우리는 흔히 막연하게 부처님을 떠올린다. 그 부처님에는 유신론적인 절대자의 이미지도 실려 있고 자주 다니던 사찰에 모셔진 불상의 모습도 담겨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부처님의 고행상에서 받는 참혹한 느낌도 들어 있다. 이처럼 불자의 가슴마다 떠오르는 부처님은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잘못 입수한 정보로 채색된 경우도 많다.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불자들이 떠 올리는 부처님은 누구에게나 일치하는 기본적인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 그 통일성에 바탕하여 각자의 신행하는 이력이 더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1 여래십호
많은 교리적 편차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정체성에 대한 표현은 대소승 경전이 일치한다. 그것은 특히 부처님 스스로 자신에 대해 표현한 것으로 주목된다. 곧 부처님은 “그렇게 온[如來], 동등한[應供],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은[正遍知], 밝힘에의 진행을 완성한[明行足], 잘 간[善逝], 세간을 아는[世間解], 더 이상 없는[無上士], 사람을 길들이는[調御丈夫], 천신과 인간의 스승인[天人師], 깨달은 어른[佛世尊]”이라고 대소승의 경론 모두에서 설하고 있다.
불자들이라면 부처님과 교법과 승단에 대해 부서지지 않을 청정한 신앙심을 확립해야 한다고 요청받는데 그 중 부처님을 신앙하라고 하는 것이 첫번째다. 그러면 부처님에 대한 신앙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인가.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그렇게 온, 동등한 내지 깨달은 어른임을 믿으라.”(南傳 相應部 <根相應品>)고 되어 있다. 부처님에 대한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표현이 바로 여래십호이기에 그것을 신앙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면 여래십호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는 여래, 응공, 정변지라는 부분이고, 두번째는 명행족, 선서, 세간해라는 부분이며, 세번째는 나머지 네 가지 이름이다. 이 중 첫번째는 여래(그렇게 온)라는 이름부터 시작하듯이 부처님의 ‘옴’에 중점을 두고 있고, 두번째는 명행족(밝힘에의 ‘진행’을 완성한) 또는 선서(잘 ‘간’)같이 ‘감’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세번째는 본격적인 중생 교화자라는 측면에 중점을 둔 이름들이다. 이러한 구분과 특징에 유의하여 이 이름들을 잘 음미한다면 부처님의 참모습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이 이름들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요청대로 이 열 가지 이름을 반드시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십팔불공법
열 가지 이름으로 규정되는 부처님은 다시 여러 가지 덕성을 갖추신 분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덕성에 대한 표현도 대소승의 경전에서 일치하므로 불설(佛說)로서의 권위가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경전에 보면 부처님은 “열 가지 힘과 네 가지 확신과 세 가지 마음 자세와 하나의 커다란 슬픔으로 구성된 열여덟 가지 법을 갖추신 분이다.”(南傳 中部 ≪大獅子喉經))라고 설한다. 이것이 바로 불자들에 의해 공유되어야 할 부처님의 모습이니 좀더 자세히 언급해 보자.
먼저 부처님의 열 가지 힘[十力]이란, “첫째 바른 도리와 그렇지 않은 도리를 판별하는 지력, 둘째 선하고 악한 업과 그 과보를 분명히 아는 지력, 셋째 네 가지 선정과 여덟 가지 해탈과 세 가지 삼매와 여덟 가지 등지(等至) 등을 분명히 아는 지력, 넷째 중생이 지닌 진리에 대한 인지 능력의 높고 낮고 열등하고 우수한 것을 분명히 아는 지력, 다섯째 중생의 여러 가지 의욕과 경향을 분명히 아는 지력, 여섯째 중생세계의 성질과 종류를 분명히 아는 지력, 일곱째 어떤 수행에 의해 어떤 도과(道果)에 나아가는지를 분명히 아는 지력, 여덟째 무시(無始)의 전생을 분명히 아는 지력, 아홉째 중생의 내생을 분명히 아는 지력, 열째 모든 번뇌가 다하는 것을 분명히 아는 지력” 등이다.
그리고 네 가지 확신[四無所畏]이란 “첫째 모든 것을 아는 자로서의 확신, 둘째 모든 번뇌를 극복했다는 자신, 셋째 수행에 장애되는 길마저 설할 수 있다는 자신, 넷째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설할 수 있다는 자신” 등이다. 그리고 세 가지 마음의 자세[三念住]란 “첫째 중생이 부처님을 신봉(信奉)하여도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바른 마음가짐을 지님, 둘째 중생이 부처님을 불신하여도 걱정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바른 마음가짐을 지님, 셋째 중생이 부처님을 신봉하거나 비방해도 기쁜 마음 또는 걱정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바른 마음가짐을 지님” 등이다.
그리고 끝으로 크나큰 슬픔[大悲]을 부처님은 지니고 계신다.
지자(知者)는 일체 중생이 생사의 고해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사도(邪道)에서 헤매지만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오욕의 갈구함이 마치 목마른 자가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나(我)가 없는데서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늙음과 병과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오히려 그 업을 짓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무명의 어둠 속에 있으면서 지혜의 등불을 밝힐 줄 모르는 것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많은 재물을 지니고도 나누어 줄 줄 모름을 보고 슬픔을 일으키고, 나쁜 벗을 믿어 선지식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음을 보고 슬픔을 일으킨다.
(≪大方等大集經))
이상의 열여덟 가지 덕성은 오직 부처님만이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부처님의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라고 부르며 부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묘사다.
흔히 불교는 소극적이고, 유신론적인 종교들은 적극적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부처님에 대한 이상의 표현과 신에 대한 그 종교들의 주장을 비교해 보면 결코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불교가 발생하던 당시 인도의 종교 사상계에서 유신론에 속하는 사상은 바라문교였는데, 그 사상은 태초의 브라만(Braman) 신에 대해서 ‘아니다! 아니다!(neti, neti)’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부연하면 신의 본질에 대해 신이란 ‘복잡하지 않고, 유한하지 않고, 모자라지 않고, 변하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둘이 아닌 존재’로 제시할 것이 예상된다.
세상은 복잡하고 유한한 것이나 신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모자라고 병들고 죽음으로 끊어지나 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세히 보면 모든 표현이 부정(否定)의 형식 논리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에 대한 부정으로 신의 위대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브라만 신은 이런 존재입니까?’하고 물으면 ‘아니다’라고 답하고, ‘그러면 저런 존재입니까?’하고 물어도 ‘아니다’라고 답하였으니 브라만 신의 본성은 결코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표현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굳이 이러한 부정적 표현 외에 신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을 찾으라면 ‘모든 것을 알며, 오로지 선한 자’라는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이 표현에 대해서도 다시 되묻게 된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이란 어떻게 아는 것이며 오로지 선하다는 것은 어떻게 선한 것인가 이 말들도 표현은 긍정적인 지 몰라도 그 속은 물음표로 꽉 차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물음에 대한 특히 서양 종교의 입장은 ‘피조물이 신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며 나아가 피조물 최대의 교만이다.’라고 경고하는 정도일 것이다. 따라서 신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표현은 ‘아니다’는 부정과 ‘왜냐’라는 의문과 ‘안 된다’는 불가능으로 엮어져 있다.
이에 반해 부처님만이 소유하는 십팔불공법에 대한 표현은 얼마나 자세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신뢰감을 주는 내용들인가. 부처님은 열 가지 힘에 의해 모든 것을 아는 자이며, 네 가지 확신에 의해 누구든지 가르칠 수 있는 자이며, 세 가지 마음 자세에 의해 가장 안식하는 자이며, 큰 슬픔으로 인해 오로지 선한 자인 것이다. 부처님이란 바로 그러한 분이니 이 모습을 불자들은 모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이처럼 부처님의 여래십호를 통하여 그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부처님의 십팔불공법을 통하여 부처님의 덕성을 잘 안다면 그것이 불타관을 정립하는 정통적인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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