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불교의 근본 교리

3절 진리관 - 5 대승불교의 연기설

香積 2010. 10. 21. 07:27

대승불교의 연기설

우리는 앞서 연기의 법칙성을 불교에 있어 완성된 진리로 규정하였는데 그러한 연기의 법칙성을 십이연기설로 이해하는 것은 다분히 초기불교의 자료에 입각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는 대승불교라는 영역이 있어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불교는 완성된다. 이 대승불교 안에도 연기의 법칙성은 불교의 진리를 표방하는 원리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 구체적인 표현은 다르다 하더라도 원리에 있어서는 일관됨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 항목에서는 연기의 법칙성이 대승불교 속에 나타나는 것을 ‘반야부 경전’의 차원과 유식학파의 차원 그리고 화엄학의 차원에서 살핌으로써 연기의 진리성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반야심경의 유심(唯心)적 사지연기

반야부 경전에서는 ‘반야바라밀다’를 궁극적 실체로 삼는다. 그것에 이른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엔 어떤 차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경전에서는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르나니, 마음의 걸림이 없다. 마음의 걸림이 없기 때문에 놀람이 없고, 뒤바뀐 생각을 넘었고, 궁극적인 열반이 있게 된다.”(梵本 ≪般若心經))라고 설하고 있다.

이 가르침을 반대로 하면 “중생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음의 걸림이 있다. 마음의 걸림이 있으므로, 놀람이 있고, 뒤바뀐 생각이 있고, 생사가 있게 된다.”로 바꿀 수 있다. 여기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지 않는 ‘마음의 걸림’이라는 것은 십이연기로 말하자면 일종의 무명에 해당한다. 무명이란 법칙성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럴 때 반야부 경전에서의 법칙성은 반야바라밀다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므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야부경전 차원의 법칙성에 의지하지 않고 무지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따라서 반야부 경전 차원에서의 무명이 바로 ‘마음의 걸림’으로 표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걸림’이 있으므로 ‘놀람’ ‘뒤바뀐 생각’ ‘생사’의 법들이 연이어 발생하거니와 이 또한 무명을 연하여 ‘행, 식 내지 죽음’이 연이어 발생하는 십이연기설과 그 유형상 일치하는 것이다. 특히 최후가 생사로 끝남으로서 진리에 대한 무지로부터 인간의 생사가 귀결되었다는 십이연기설의 의미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나아가 ≪반야심경≫은 마음의 가림에서 생사가 발생한다는 측면보다는 마음의 가림을 멸진함으로써 생사가 사라진 궁극적인 열반을 얻게 됨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연기의 법칙성이 죽음의 극복을 반드시 성취하고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반야심경≫에 설해진 ‘마음의 걸림’ ‘놀람’ ‘뒤바뀐 생각’ ‘생사 윤회’의 네 가지 법의 발생은 사지연기(四支緣起)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다. 초기불교의 연기가 열두 단계로 이루어진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로 불리는 것과 상응시킬 만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야부 경전에도, 전개되는 단계의 수효와 내용의 차이가 있지만, 연기의 법칙성은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유식사상의 아뢰야연기설

서력 기원 약4세기경에 인도에서 흥기하기 시작하는 유식사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중생의 분별망집(分別妄執)을 문제로 삼는다. 그리하여 가장 기본적인 것을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부르고, 중생 존재의 기초가 되는 몸[有根身]과 그것이 살고 있는 외계[器世間]가 모두 아뢰야식이 전변(轉變)한 것이라고 설한다.

이러한 아뢰야식이 있게 되면 그것을 대상으로 ‘나’라는 생각과 집착이 다시 일어나게 되니 그런2차적 사량분별을 말나식(末那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러한 말나식이 있으면 다시 아뢰야식에 의해 여섯 경계를 식별하는 육식(六識)이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주관적 심식의 이러한 전개과정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아뢰야식이다. 따라서 그것을 근본식(根本識)이라고 하고 나머지 (말나식과 육식)를 전식(轉識)이라고 한다. 이러한 팔식과 육신(肉身)은 결국 생사 윤회를 면하지 못하고 바깥 세상도 생멸을 면하지 못한다. 그것은 근원이 되는 아뢰야식이 무상한 분별망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팔식 및 모든 세계는 이 아뢰야식을 근본으로 하여 ‘연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식사상에서는 일체법에 대한 세 가지 자성을 주장할 때 모든 존재에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 내재한다고 한다. 의타기성이란 일체법의 연생자성(緣生自性)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은 무명을 연하므로 행이 있고 내지 큰 고온(苦蘊)이 있게 됨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成唯識論)).

나아가 무상한 팔식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근본식인 아뢰야식을 대원경지(大圓鏡知)라는 지혜 모습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유식사상 차원에서의 법칙성에 대한 무지를 일컫는 아뢰야식을 그 차원에서의 법칙성에 대한 지혜로 전환하라는 의미다. 유식사상에서는 그러한 법칙성을 진여(眞如)라고 부르기도 하고 유식실성(唯識實性)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도 무명을 제거하여 명의 경지로 전환함으로써 생사의 괴로움이 소멸한다는 십이연기의 죽음의 극복에 관련된 소식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따라서 유식사상 속에서도 연기의 법칙성은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3 화엄학의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

화엄학은7세기 전후에 중국에서 대성한 불교학이다. 이 화엄학의 근본 골자가 바로 법계연기론이다. 법계연기란 ‘법계가 곧 연기한 세계’라는 미묘한 뜻을 나타내고 있으니 그 심오한 뜻의 일단은 네 가지 법계를 살피면 얻을 수 있다. 네 가지 법계는 첫째가 사법계(事法界)이고, 둘째가 이법계(理法界)이며, 셋째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이고, 넷째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이다. 이 중 사법계는 모든 차별되는 개체로 구성된 현상계이고 이법계는 구별되는 개체 속에 일관되게 내재된 원리, 법칙, 보편적 진리와 같은 것을 드러낸 본체계다. 그리고 이사무애법계는 본체계와 현상계가 둘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걸림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끝으로 사사무애법계는 개체와 개체마저 상호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서 통합됨을 뜻한다.

이러한 네 가지 법계를 보면 법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만날 수 있거니와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온 법계에 대한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즉 법계는 법칙성을 요소로 하는 일체 존재의 세계를 뜻한다. 그럴 때 개개의 일체 존재와 법칙성은 불일불이의 관계에 있다고 했다. 여기서 불일(不一)의 관계에 있어 서로간의 구별이 지켜지는 면이 있음을 드러낸 것이 사법계(개별적 존재)와 이법계(법칙성)의 입장이다. 그리고 불이(不異)의 관계를 드러낸 것이 이사무애법계의 입장이다. 특징적인 것은 화엄학의 사사무애법계인데 이것도 이사무애법계를 바탕에 두어 불이의 관계를 궁극에까지 밀고 들어간 형태인 것이다.

연기법은 십이연기설에서부터 이미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이해되어 왔다. 첫째가 연기의 법칙성에 대한 것이고, 둘째가 법칙성에 대한 무지[無明]에서 시작하여 괴로움의 발생하는 과정[順觀]에 대한 것이고, 세째가 법칙성에 대한 지혜를 회복함[明]으로써 차례로 죽음의 괴로움이 극복되는 과정[逆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럴 때 화엄학의 법계에 대한 고찰은 첫번째의 법칙성 그 자체에 중점을 두면서, 두번째의 괴로움이 발생하는 과정의 연기와 세번째의 괴로움이 극복되는 과정의 연기를 통합하고 있는 형태다. 그것이 바로 사사무애법계로서 개체와 개체가 자재융섭(自在融攝)하여, 제법이 서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며(相入) 하나가 되어(相卽) 원융무애한 세계를 무한히 연기론적으로 발생시키고 있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사사무애법계를 화엄학에서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라고 일컬으니 화엄의 심오한 사상도 오직 연기법에 입각한 것일 뿐이다.

이처럼 연기법은 초기불교의 자료 속에서 선양되는 십이연기설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경전과 학파 및 중국의 화엄교학에까지 일관되게 적용되어 불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