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정토왕생의 믿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불교는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중점적으로 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자각(自覺)의 깨달음이다. 그러나 정토부 경전에 오게 되면 누군가의 각타(覺他)에 의존하게 된다. 마치 유신론적 종교와 같은 타자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주요한 방법이 되는데, 그 주된 방법이 아미타라는 부처님과 극락이라는 불국정토의 존재 및 염불왕생(念佛往生)의 진실을 믿는 것으로 규정된다.
자각(自覺)이라고 하지만 그곳의 불교도 자세히 살펴보면 역시 타자의 도움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곧 불교란 개인의 깨달으려는 노력과 부처님의 깨닫게 하려는 노력이 함께 어우러져 성취되는 것으로서 부처님이 전제되지 않은 채 혼자서 깨달으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불교는 깨달은 자가 깨닫고자 하는 자를 깨닫게 하는 종교라고 설하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깨달으려는 노력의 태도에서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깨닫게 하려는 노력의 관점에서도 음미할 바가 있다.
그러면 부처님의 입장에서 불교를 말해 보자. 부처님은 중생을 깨닫게 하여 자신과 같은 부처를 이루게 해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이 중생을 가르치는 데(깨닫게 하는 데) 두 가지 방향이 자연히 예상된다. 하나는 중생 속에 찾아와 깨달음의 길을 보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생을 불러들여 깨달음의 길을 보이는 것이다. 이 중에서 중생 속에 찾아와 깨달음의 길을 보이신 대표적인 부처님이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그리고 그 부처님의 중생교화를 궁극적으로 밝힌 경전이 ≪법화경≫등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찾아온 중생의 세계는 오탁악세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찾아와야 하므로 그곳 중생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된다. 아울러 끝없이 중생 속에 뛰어들어 교화하려면 그 수명은 헤아릴 수조차 없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신앙의 주제를 만나게 된다. 곧 여래의 구원실성(久遠實性)과 수명무량(壽命無量)을 신해(信解)해야 한다. 그것은 부처님만이 다 알 수 있는 내용이므로 부처가 되기 전의 수행자에게는 미지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곧 알지 못하는 것이지만 수용해야 하고 그 방법은 신앙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화(또는 화엄)의 차원에서도 우리는 이미 상당한 수위의 신앙을 요청받고 있었음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중생을 불러들여 깨달음의 길을 보이신 부처님을 살펴보자. 이러한 대표적인 부처님이 아미타 부처님으로 바로 정토부 경전이 아미타 부처님의 교화를 밝힌 경전이다. 그런데 그 부처님이 중생을 불러들이는 세계는 오탁악세가 아닌 정토다. 그리고 부처님이 중생을 불러들여야 하므로 중생과 같은 모습이어서는 안 되고 중생의 관심을 끌 만한 모습이어야 하므로 무량한 광명으로 스스로의 장엄[佛身莊嚴]을 보이고 일곱 보배로 극락장엄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정토로 불러들인 중생을 제도하려면 정토에서의 수명을 무량하게 가져야 한다. 그래야 중생들과의 만남을 성취할 충분한 기회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열반에 들더라도 관세음(觀世音)과 대세지(大勢地) 보살을 차례로 부처님의 위를 잇게 함으로써 정토에서의 부처님의 상속이 영원히 계속되게 한다.
또한 “아미타 부처님의 수명의 횟 수는 매우 길고 오래 되었으니 누가 마땅히 그것을 알고 믿겠는가? 부처님 홀로 그렇다고 알고 믿을 뿐이다.”(≪佛說無量壽經))라고 설한다. 여기서는 여래의 무량한 수명을 주장하는 ≪법화경≫의 분위기가 그대로 계승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번에는 중생의 입장에서 불교를 말해 보자. 중생은 근본적으로 부처님을 만나지 않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부처님에게 두 가지 교화 방향이 있으므로 부처님에 의지하는 방법에도 두 가지가 있게 된다. 먼저 부처님이 찾아온 경우는 부처님을 만나서 뵈었기에 그 분의 실재(했음)를 믿는 것은 쉽다. 그렇지만 현실은 오탁악세이므로 깨달음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어렵고 깨닫기는 더 어렵다. 그리하여 행하기 어려운 여건이지만 괴로움을 해결하고 부처를 이루겠다고 강한 원을 세워야 한다(華嚴 十地의 제一 歡喜地).
다음은 부처님을 찾아가야 할 경우인데 아미타 부처님은 죽은 뒤에 가서 뵙는 대상이므로 지금으로서는 본 적이 없어 그 분의 실재를 쉽게 믿을 수는 결코 없다. 그러나 가기만 하면 오탁이 사라진 불국정토이므로 깨닫는 노력도 용이하고 깨달음을 이루기도 쉽다. 그리하여 믿기 어려운 여건이지만 극락에 왕생하여 부처를 이룰 수 있도록 아미타불의 존재성을 강하게 신앙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지금껏 살펴본 초기 및 대승불교의 자각적 수행의 흐름과 정토부의 사상은 종이의 양면과 같은 것임을 말할 수 있다.
정토 사상에서의 신앙의 대상은 아미타불과 극락정토의 존재성 그리고 염불 왕생의 진실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럴 때 그 신앙은 무턱대고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근거를 확보하여 믿어야 한다.
우선 인과의 법칙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생(前生)의 존재성을 보자. 그것은 기억나지 않으므로 결코 실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는 업인과보의 삼세윤회를 가르친다. 이것은 바로 인과의 법칙에 의한 단언이다. 그리하여 우주의 성립도 지켜본 것은 아니나, 하나의 결과로서 그것은 공업을 원인으로 한다고 설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경전에서 법장 비구의 48대원과 그것의 완벽한 실천에 대해서 보게 되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극락과 아미타불이라는 결과가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즉 인과의 법칙에 입각하는 한 전생을 믿는다면 극락과 아미타 부처님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상(實相)의 법칙을 음미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실상 곧 참존재에 대한 언급이 미묘하다. 이미 불교에서는 죽어 보지도 않고 죽음의 구조를 해명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 설하고 있다. 여기서 죽음을 실제 경험하지도 않고 죽음을 경험한 이상으로 정확하게 죽음에 대해 포착하는 것도 참으로 신비한 부분으로서 음미할 만하지만 그렇게 포착된 죽음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죽음 자체를 극복하여 참존재를 획득한다는 것도 주목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참존재가 궁극적으로 죽음으로 귀결되는 생사의 양면 관계 또는 상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 지금의 주제와 관련하여서는 가장 주목하여야 한다. 곧 죽음이 있으면 불사(不死)가 있고(南傳 小部 ≪佛種姓經)) 차안이 있다면 피안이 있고, 중생이 있으면 부처가 있고, 오탁악세가 있으면 불국토가 있으니, 극심한 지옥이 있으면 극락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나아가 우리를 찾아와 교화하는 부처님이 계시면 우리를 불러들여 교화하는 부처님도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극락정토와 아미타 부처님의 실재성을 또 한번 믿을 수밖에 없는 근거를 음미하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계합(契合)의 법칙을 살펴보아야 한다. 불교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법칙은 모든 것은 유사한 법끼리 무리지어 화합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악업을 지은 자들은 악업을 지은 자들끼리 어울린다. 선업을 지은 자들은 선업을 지은 자들끼리 어울리니 전자의 극단적인 경우가 지옥 등의 악취이고 후자의 최상의 경우가 천상인 것이다. 마찬가지의 논리가 극락정토의 실재성과 왕생의 진실성을 담보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 곧 아미타불을 부르고 그의 정토에 가서 태어나고자 하는 자들은 또한 그들끼리 모일 수밖에 없음을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아미타 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나려는 자들은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가 주제로 될 뿐이다. 그런 자들이 모여 또한 아미타 부처님의 정토가 더욱 번창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토부 경전에 입각할 때 극락에 왕생하기 위한 노력은 다음과 같다.
① 다섯 가지 악을 짓지 말아야 한다[止惡] 다섯 가지 악이란 살생과 모함과 사음과 교만과 무책임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② 어렵지만 선을 지어야 한다[行善] 악세 또는 예토에서의 선업이 훨씬 수승한 것이라고 정토부 경전은 설한다. ③ 보리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發心]. ④ 극락정토를 지극하게 믿어야 한다[至心]. ⑤ 그 믿음에 기쁨을 느껴야 한 [信樂] ⑥ 정토에 나기를 원해야 한다[欲生]. ⑦ 아미타 부처님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念佛]. 그럴 때 감응도교(感應道敎)라 하여 능히 느끼는 자[感] 곧 부르는 자와, 능히 응하는 자[應] 곧 아미타불이 서로 사귀는 것[道敎]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경험을 공유한 자들이 함께 가서 태어나는 곳이 극락정토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아미타불과 극락정토는 인과와 실재와 계합의 법칙을 궁극에까지 치밀하게 밀고 나감으로서 확인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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