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벽지보리와 삼먁삼보리
부처님이란 깨달음을 얻은 분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 따라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해 논하는 것은 부처님에 대해 살펴보는 또 다른 핵심적인 방향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먼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단 한 번에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범어 아눗타라삼약삼보디(anuttarasamyaksam.bodhi)라고 하는데 그 뜻은 ‘최상의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최상이라는 말은 그 하위의 것이 있다는 말로 이해된다. 실제 경전에서는 일종의 하위의 깨달음에 해당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
1 벽지보리의 존재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부처님은 위없는 깨달음의 사람이었고, 무상정등각자(無上正等覺者)의 덕성에 중점을 두어 살펴보았다. 그런데 바로 이와 함께 경전에서는 벽지불(隻支佛)이라는 부처님을 설한다. “두 가지 부처님이 있다. 하나는 여래, 응공, 정등각자이고, 다른 하나는 벽지불이다.”(南傳 增支部 二法部) 여기서 프라티예카 붓다(Pratyeka buddha)의 소리 옮김인 이 벽지불은 일찍부터 연각(緣覺) 또는 독각(獨覺)이라고 번역하였던 것인데 그 교리적 위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꽤 까다롭다. 왜냐하면 벽지불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일반적인 부처님을 언급하는 명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역시 ‘부처님’이라는 말을 끝에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벽지불이란 어떤 부처님인가. “벽지불은 중생들 가운데 고갱이이며, 떨림 없는 분들이며, ‘벽지보리(하나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한 분들이다. 화살을 뽑았고, 재생(再生)으로 이끄는 번뇌가 다하셨다. 괴로움의 뿌리를 잘랐고 죽음의 힘에 정복되지 않고 승리하신 분들이다. 교만을 도려내었고, 얼룩을 벗었고, 지고의 용기를 지녔고, 최후의 몸을 지니신 분이다.”(南傳 中部 ≪이시길리經))
여기서 보면 ‘벽지보리(하나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한 자라는 규정이 주목된다. 벽지불의 경우 깨달음 중에서도 벽지보리를 얻은 자라고 명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경전 속에서 벽지불에 대한 언급이 벽지보리와의 관계 속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음을 볼 때 삼먁삼보리에 하위의 깨달음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삼먁삼보리를 단번에 성취한다기보다는 벽지보리를 경유하여 삼먁삼보리를 성취한다고 봐야 할 것이며 이 두 가지 깨달음을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부처님에 대한 이해도 보다 확실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2 깨달음의 세 가지 범주
그러면 먼저 이 두 깨달음의 같은 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어느 깨달음이든 깨달음이란 아는 것이다. 깨달음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그것이 단순한 느낌이라면 결코 보편성과 타당성을 띠지 못한다. 여인이 겪는 출산의 고통을 남자들이 결코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부처님은 깨달음을 아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고도로 정밀한 지적 체계가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지적인 체계이므로 말로 표현할 수 있고 그 말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바탕을 얻게 되는 것이다.
둘째, 깨달음은 보는 것이다. 깨달음이 아는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단순한 지적 관념의 연결에 그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모습을 지닌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은 어떤 모습을 전제로 고도의 지적 체계를 세우고 있는 것이므로 단순한 관념의 유희에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표현이고 그 모습은 행자의 수행의 정도에 따라 밝혀지는 것이므로 의미있는 말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한 법이 가지는 그러한 모습을 법상(法相)이라고 한다. 바로 그 법상을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셋째, 깨달음은 타동사로서 무언가를 깨닫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깨닫는 것인가. 바로 궁극적 참존재를 깨닫는 것이다. 참존재란 우선 참존재라는 표현부터 이해해야 한다. 참존재는 불생불멸을 특징으로 한다. 결코 무에서 생하고 무로 멸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참존재가 단순한 관념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무언가 정해지지는 않으나 어떤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이러한 불생불멸의 참존재를 전통적으로 실상(實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실상에는 수준의 높고 낮음에 따라 몇 개의 구별이 있다. 깨달음의 완성은 여러 실상 중에서도 궁극적 실상을 깨닫는 것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이러한 궁극적 참존재들의 체계를 전통적으로 실상문(實相門)이라고 부른다.
넷째, 우리는 실상을 발견하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러한 불생불멸의 실상이야말로 참으로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생하고 멸하거나 나고 죽는 것으로 귀결된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것은 생멸하는 세계인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불생불멸의 실상이라는 것은 대단히 모순되어 보인다. 부처님은 우리의 생멸계란 실상에 대한 망집, 착각, 배반을 시작으로 이탈되어 나온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이탈되는 과정을 정확히 깨달았으니, 이처럼 실상으로부터 이탈되는 과정도 깨달음의 내용이 된다. 전통적으로 이 과정을 연기문(緣起門)이라고 불렀다.
다섯째, 우리의 현실이 생멸의 괴로움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불생불멸의 실상에서 이탈되어 나온 것이므로 우리는 그곳으로 되돌아 갈 수 있고 또한 되돌아 가야 한다. 그러나 그냥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가진다고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니다. 수행을 해야한다. 이러한 수행의 체계를 전통적으로 수행문이라고 불러 왔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바로 이 수행에 대한 깨달음까지 포함한다.
3 열반, 반야바라밀다, 여(如)
‘생멸하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緣起) 체계적인 수행을 함으로써 우리는 불생불멸의 실상계로 되돌아 가게 된다.’는 것이 바로 깨달음의 기본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돌아 간 세계로서 경전에서 널리 이야기 되는 첫번째 세계가 바로 열반의 경지이다. “열반에는 죽음도 없고 재생도 없고 감도 없고 옴도 없다. 오직 진실한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南傳 小部 ≪自說經))고 설해진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면 이 열반을 증득하는 깨달음이 바로 삼먁삼보리일까? 그렇지 않다. 열반을 증득한 것은 벽지보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열반은 사제법의 궁극적 경지이면서 십이연기설의 기본적인 근거가 되고 있는데 십이연기설에 보다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십이연기와 관계하는 위치가 바로 벽지불이므로(≪法華經) <序品>) 열반은 벽지보리의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열반이 더 이상 궁극적 경지가 아니라면 어떤 것이 더 궁극적인 경지일까? 경전에서 우리는 반야바라밀다 또는 구경열반 등으로도 표현되는 세계를 일단 만나게 된다. 곧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 마음에 가림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뒤바뀐 생각을 넘었고 구경열반을 성취하였다(梵本 ≪般若心經)).” 여기서 구경열반이란 궁극적인 열반이라는 뜻으로 열반에도 초기의 것과 궁극적인 것과의 구별이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한 번의 열반이 있고 난 뒤에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깨달음의 세계가 점점 펼쳐진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구경열반 또는 반야바라밀다의 경지는 마지막 경지라고 볼 수 있는가. 경전에서는 새로이 주목해야할 실상의 세계를 언급하니 그것은 곧 ‘그러한 것(여[如])’의 세계이다. “제법의 실상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능히 다 알 수 있는 것으로 모든 법은 그러한 정체, 그러한 존재방식, 그러한 표현, 그러한 특상, 그러한 자성을 지닌다(梵本 ≪法華經) <方便品>).” 여기서 그러한 정체 내지 그러한 자성은 ‘그러한 것’이라는 최종적인 경지에 대한 자세한 표현들이다. 그런데 그것을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오직 알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것은 앞서 보살이 파악했던 반야바라밀다와 구경열반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번째로 ‘그러한 것’이라는 실상의 세계를 말해도 좋다. 그럴 때 앞서 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대상이 바로 이 ‘여(그러한 것)’가 아닌가 한다. 최종적인 것은 역시 반야바라밀다이기보다는 ‘여’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최상의 깨달음이므로 최상의 깨달음의 대상은 최종적인 ‘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국 부처님이란 연기의 세계에서 수행을 통하여 실상을 깨닫되 열반의 경지를 먼저 깨닫고[隻支佛] 이어 반야바라밀다의 경지를 경유해 ‘그러한 것’의 경지를 깨달은 자[無上正等覺者]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을 얻으면 무량한 수명 속에서 열여덟 가지 덕성(십팔불공법)을 갖춘 채 중생 교화를 계속하는 영원한 부처님이 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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