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불교의 근본 교리

5절 수행관 - 2 초기불교의 수행상

香積 2010. 10. 21. 07:34

2 초기불교의 수행상

수행은 전환하는 것이고 되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최종적으로 깨달음의 존재로 전환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실천하는 것이 불교의 수행이었다. 그런데 그 깨달음에 이미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이른바 벽지보리와 삼먁삼보리였다. 여기서 우리는 벽지보리를 증득할 때의 수행과 삼먁삼보리를 얻기 위한 수행에 구별이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사실 벽지보리를 증득하기 위한 수행이 바로 초기불교의 수행이고 삼먁삼보리를 증득하기 위한 수행이 대승불교의 수행이라 볼 수 있다. 초기불교(初期佛敎)란 주로 ≪아함경(阿含經)≫을 중심으로 살피게 되는 불교의 한 영역이다. 여기에는 부처님의 음성이 어떤 수정이나 변용도 입지 않은 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어 주목될 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토대를 제공하기에 불자들이 가장 먼저 공부해야 할 불교다.

이 초기불교의 수행은 벽지보리를 성취하기 위해 다시 크게 두 가지 계열의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곧 선정(禪定) 수행과 조도(助道) 수행이다. 이 항목에서는 먼저 선정 수행부터 살펴보고자 하는데 그럴 때 우리는 무엇보다 초기불교 선정설의 핵심인 구차제정(九次第定)의 가르침에 주목하게 된다. 경전에서는 그 전모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삼림 속의 어떤 사슴은 숲속에서 움직이되 가고 서고 앉고 잠을 자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이 있다. 왜 그런가? 사냥꾼의 영역에서 완전히 떠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어떤 수행자는 ① ‘애욕과 선하지 못한 법을 떠나서 사색과 사려를 갖추고 떠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갖춘 첫번째 선정을 구족하여 지낸다.’ 제자들아, 이것이 발 없는 악마를 어둡게 만든 것이며 악마의 눈을 공격하여 악마가 보지 못한 곳으로 간 것이다.




나아가 어떤 수행자는 ② ‘사색과 사려가 적정해져 안으로 깨끗하고 마음이 하나가 되고 사색과 사려가 없고,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갖춘 두번째 선정을 구족하여 지낸다.’ 이것이 악마가 보지 못한 곳으로 간 것이다.



나아가 어떤 수행자는 ③ ‘기쁨에 대한 탐착을 떠나 담담히 바라보며 지낸다. 그리고 되새김과 알아냄을 갖추고 즐거움을 몸으로 느낀다. 그리하여 “담담히 바라보고 되새김을 갖춤은 즐거운 삶이다”라고 성인들이 말하는 세번째의 선정을 구족하여 지낸다.’ 이것이 악마가 보지 못한 곳으로 간 것이다.



나아가 어떤 수행자는 ④ ‘즐거움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어, 또 안심과 근심도 이미 과거에 소멸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아, 담담히 바라보면서도 되새김을 갖추어 청정한 네번째 선정을 구족하여 지낸다.’ 이것이 악마가 보지 못한 곳으로 간 것이다.



나아가 어떤 수행자는 ⑤ ‘모든 색의 생각을 넘고, 걸림의 생각을 없애고, 여러 가지 생각을 사유하지 않음으로부터 “허공은 가없다”는 가없는 허공의 자리를 갖추어 지낸다.’ 이것이 악마가 보지 못한 곳으로 간 것이다.



나아가 어떤 수행자는 ⑥ ‘가없는 허공의 자리를 넘어서 “식별은 가없다”라는 가없는 식별의 자리를 갖추어 지낸다.’ 이것이 악마가 보지 못한 곳으로 간 것이다.



나아가 어떤 수행자는 ⑦ ‘가없는 식별의 자리를 넘어서-어떤 것도 아니다.-라는 어떤 것도 아님의 자리를 구족하여 지낸다.’ 이것이 악마가 보지 못한 곳으로 간 것이다.



나아가 어떤 수행자는 ⑧ ‘어떤 것도 아님의 자리를 넘어서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님의 자리를 갖추어 지낸다.’ 이것이 악마가 보지 못한 곳으로 간 것이다.



나아가 어떤 수행자는 ⑨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닌 것도 아닌 모든 경계를 넘어서 생각과 느낀 바의 소멸을 구족하여 지낸다. 그리고 지혜로 보아 역류하는 번뇌가 모두 사라진다.’ 이것이 발없는 악마를 어둡게 만든 것이며 악마의 눈을 공격하여 악마가 보지 못하는 곳으로 간 것이다.

(南傳 中部 ≪파사라시經))

이상과 같은 아홉 단계의 선정을 ‘구차제정’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 단계들이 반드시 순서와 차례를 지키며 진행되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중 ①에서 ④까지를 색계사선(色界四禪)이라고 부르며, ⑤에서 ⑧까지를 사무색정(四無色定)이라고 부른다. 이 사무색정을 또한 차례대로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지막 ⑨의 단계를 상수멸정(想受滅定)이라고 부른다.

이상이 초기불교 선정설의 핵심인 구차제정의 수행법인데 다시 이것의 핵심이 되는 것이 ‘삼매’다. 삼매는 인도 말 사마디(sama dhi)의 소리 옮김인데 우리말로는 ‘집중’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단순한 집중을 뜻하는 것이 아니므로 삼매의 전후사를 잘 살필 필요가 있다. 우선 삼매에 들기 전에 욕심, 분노, 흥분, 졸음, 의혹 등의 번뇌가 제거되어야 하고, 아울러 치밀한 논리를 전제로 해야 한다. 이 중 논리에 관해서는 좀더 언급할 것이 있다.

우리는 불교를 탈논리의 종교로만 봐서는 안 된다. 부처님을 논리의 화신(Embodied Logic)이라고 부른다는 것과 깨달음이 고도로 정밀한 지적 체계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불교가 논리적인 종교이며 삼매도 그 논리를 바탕에 두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논리에는 커다란 공덕이 있다. 불교는 본래 마음과 물질이 미묘하게 화합해 있는 것을 주제로 삼아 수행을 전개한다. 여기서 물질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정신의 세계는 파고들면 들수록 극도로 혼란스러워진다. 이때 우리로 하여금 방향을 잡게 해주는 것이 바로 논리의 공덕이다. 그런데 기존의 논리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나타난다. 바로 이 문제 앞에 그 해결을 위하여 집중하는 것이 비로소 불교의 삼매다. 그러기에 불교의 삼매는 무턱대고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삼매는 단순한 음성이나 개념에 대한 집중이 아니다. 반드시 모습을 전제해서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의 깨달음이 ‘보는 것’이라고 규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삼매에 든 수행자는 ‘참아야 함’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집중할 때는 견디기 어려운 긴장감에 압도되기 마련이어서 붕괴될 듯한 느낌마저 받게 된다. 이런 것을 능히 참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능히 기존의 논리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 인내심으로 능히 참으면서 집중하고 있으면 그 집중이 올바를 때 직관과 안식이 경험된다. 직관은 문제를 타파하는 것을 말하고 안식은 그 문제를 해결하여 지고의 경지에 드는 것을 말한다. 집중은 마냥 집중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삼매로만 존재하는 삼매는 이미 불교의 삼매가 아닌 것이다. 불교의 삼매는 직관과 안식을 얻기 위한 수단의 성격이 강하다. 목표만큼 수단도 중요시 여기기에 삼매의 위상이 강조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당한 불교의 삼매는 직관과 안식을 반드시 동반한다고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한 삼매를 성취한다면 구차제정의 핵심을 얻는 것이고, 구차제정을 성취하면 깨달음을 증득하여 범부에서 깨달은 자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 깨달음 중에서도 벽지보리의 깨달음을 성취한 자로 전환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상의 경문 가운데 악마가 등장하는데 불교 경전에서의 악마는 대개 죽음을 상징하는 신화론적인 표현이다. 원래 ‘마’라는 말의 근원은 인도 말 마라(ma ra)인데 이 말은 √m라는 동사의 명사형이다. 그리고 √m는 ‘죽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마라는 ‘죽음(의 신)’을 뜻하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위의 경문은 구차제정을 통하여 악마가 보지 못하는 곳으로 갔다고 누누이 언급하거니와 이것은 바로 구차제정을 통하여 죽음의 경지를 넘어섰다는 뜻이다. 여기서 죽음의 극복이 바로 ‘열반’을 뜻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열반과 관련된 깨달음이 바로 벽지보리임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수행이 깨달음 중에 벽지보리 경지에 이르는 수행이라는 서두의 언급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