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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인간관 - 3 인간 존재의 본질적 구조

香積 2010. 10. 21. 07:15
3 인간 존재의 본질적 구조

인간이란 철저히 자유의지적 존재라고 했다. 그러기에 인간이 경험하는 어떤 행복과 불행도 그 근원은 인간 자신일 수밖에 없다. 특히 종교가 궁극적으로 해결해야 할 ‘죽음’이라는 사건도 인간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라는 입장을 지닌다. 이처럼 인간만이 인간을 결정하는 과정은 어떤 것일까. 불교에서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구조를 설하면서 그 구체적인 과정을 밝히고 있다.

먼저 인간을 마음과 몸으로 구성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은 상식이다. 이 중 몸은 물질로 구성된 것으로 그 물질은 인간 외의 자연의 존재들도 구성하고 있다. 여기서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과 일반 자연물을 구성하는 물질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인간을 구성하는 마음과 몸에 대해서 살피려는 이 항목에서는 자연히 그 폭을 넓혀 마음과 물질 전반에 대해서 고찰하게 된다.

그런데 마음에 대해서는 역대의 사상가들이 비교적 세심히 살폈다. 그래서 영혼불멸론자들은 마음이란 몸을 이루는 물질과는 전혀 다른 실체라는 견해를 폈고, 단멸론자(斷滅論者)들은 마음을 물질의 종속적 현상으로 보았다(영혼불멸론과 단멸론의 자세한 취급은 제5항을 볼 것). 이와 같이 두 견해는 마음의 본질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을 이루는 물질에 대해서는 거의 비슷한 이해를 하고 있다. 두 견해가 물질에 대해서 서로 비슷하게 이해한 내용은 한마디로 ‘물질이란 공간을 채우는 것’이라는 정도다.

그러나 물질이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다. 물질을 깊이 연구한 현대의 자연과학은 ‘물질이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기술하는 편리한 공식’으로 설명한다고 한다. 꽤 까다로운 설명이지만 ‘장소를 차지하는 것’이라는 관점과는 자못 다름을 직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대물리학의 물질관도 현재 개척 중인 첨단 이론에 입각한 것이어서 계속적인 연구와 수정은 불가피하다고 한다.

우리는 일체의 세계가 십이처로 구성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십이처에는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있다. 하나는 형태적 변화인데, 예를 들어 사람이 돌을 밀면 민만큼 밀린다고 할 때 우리는 형태적인 변화를 관찰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나 돌 그 자체는 변함이 없이 그들이 존재했던 위치 등의 외적인 상태의 변화만이 관찰된 것이다. 그런데 십이처는 이러한 형태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설명한다. 예를 들면 사람의 성장 및 노쇠 과정과 술이 식초로 변하는 경우 등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라고 누누이 경전에서 설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러한 십이처의 질적인 변화를 세심히 고찰함으로써 부처님은 마음과 물질로 이뤄진 존재의 본래적인 구조를 밝혀내고 그것으로써 죽음에 관련된 문제의 해결에 대한 실마리마저 제공한다.

존재의 질적 변화의 일례로서 술이 식초로 변할 때를 살펴보자. 술이 식초로 변할 때 우리는 식초를 술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안다. 이렇게 다르게 아는 것을 ≪아함경≫ 등에서 부처님은 식별(識,vija na)이라고 부른다. 식별은 다시 여섯 가지로 세분되며 그 뜻은 보다 포괄적이지만 핵심적인 뜻은 십이처의 질적인 변화를 설명하는 데 있다.

육근과 육경과 육식은 인식론적인 경과를 표현하는 말들이지만 단순하고 일반적인 인식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전제로 한 인식론적 표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변화 이전의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 표현이 육근과 육경의 십이처이고 변화 이후의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 표현이 육식인 것이다.

생하고 멸하는 앞뒤의 두 존재인 육식과 육근, 육경 사이에는 ‘의존 관계’가 성립한다. 그런데 의존 관계는 현실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의존하는 것’과 ‘의존되는 것’이 동시에 갖춰져야 성립할 수 있다. 식초가 발생하기 위해 술에 의존한다면 의존하는 식초와 의존되는 술은 동시에 존재함이 요청된다.

이러한 요청에 의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가졌던 생멸의 개념을 수정하게 된다. 즉 식초가 생했다고 할 때 식초는 완전한 무(無)로부터 생했다기보다는 어딘가에 잠복해 있다가 현상계로 ‘드러났다’고 보게 된다. 또 술이 멸했다고 할 때에도 술은 완전한 무(無)로 사라졌다기보다는 현상계로부터 ‘잠복했다’고 보게 된다. 이처럼 생멸의 개념을 ‘드러남과 잠복함’으로 수정하게 되면 술과 식초는 다른 차원에서나마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둘 사이의 의존 관계는 원만히 성립하게 된다.

≪아함경≫에서 부처님은 이처럼 다른 차원의 두 세계에서 드러나고 잠복하면서 의존 관계를 맺고 있는 육식과 육근, 육경을 십팔계설(十八界說)로 정립하신다. “십팔계가 있다. 곧 육근계와 육경계와 육식계가 그것이다(≪雜阿含) 제16권).” 여기서 계(界,dha tu)라는 술어는 층(層),요소 등을 뜻하는 말로서, 질적으로 변화한 앞뒤의 두 존재 곧 육식과 육근, 육경이 요소로서 참여해 중층(重層)적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부처님은 이러한 십팔계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육식과 육근, 육경이 모두 몇 개의 기본적인 물질원소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임을 발견하셨다. 부처님은 당시 인도의 사대설(四大說)을 받아들여 지, 수, 화, 풍의 네 원소를 기본으로 삼았다. 그런 뒤 이들4원소의 입장에서 십팔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지계(地界), 수계(水界), 화계(火界), 풍계(風界), 공계(空界), 식계(識界)로 구성된 육계(六界)의 구조’를 파악하라고 하셨다 (≪中阿含) <多界經>).

존재는 이제 주어진 공간을 메우는 단순한 덩어리로서 파악되서는 안 된다. 질적인 변화에 참여한 전후 두 존재의 의존 관계를 중심으로, 차원을 달리하며 이루고 있는 층의 구조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