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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인간관 - 5 죽음의 실상과 불사(不死)의 가능성

香積 2010. 10. 21. 07:17

5 죽음의 실상과 불사(不死)의 가능성

인간은 종교적 동물이며 형이상학적 동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의식주의 확보라고 하겠지만 동물과 달리 인간은 주어진 삶 자체가 지닌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문제성을 더욱 크게 의식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여기에 있는가? 왜 나는 살아야 하는가? 나는 무엇인가? 왜 나는 결국 죽어야 하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들은 이렇게 물으면서 고민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문들 중에서 보다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죽음의 문제일 것이다. 나는 이미 태어나서 여기에 살고 있지만 죽음은 이제 닥쳐올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무엇이며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이 의문이야말로 인간이 던지는 종교적 질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며 나아가 인간이 지닌 문제 중에서 가장 고뇌스러운 문제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대개 두 가지의 기본적인 견해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죽음이란 마음이 몸을 떠나는 것으로 죽어도 마음 만의 불멸에 의해 사후 존재가 지속된다는 영혼불멸론이다. 이에 반해 또 하나는 죽음이란 몸을 이루는 물질 요소의 흩어짐인데 마음이라는 것이 물질에 종속된 현상에 지나지 않아 죽고 나면 흩어지는 물질만 남을 뿐 사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멸론이다

이 두 견해는 역사적으로 면면히 맥을 이어오고 있는 사상들로서 피차간에 상당한 근거로 정립되어 있다. 그런데 그 근거들은 역으로 서로에게 치명적인 모순점을 일깨우고 있어 어느 견해도 완벽한 진리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마음과 몸을 연구하는 현대 사상의 결론이기도 하다. 사실 불교에서도 삼법인설(三法印說)과 삼세윤회설(三世輪廻說)을 통해 두 견해를 일단 부정하고 지양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부처님의 여러 가르침 중에서 죽음의 문제와 관련해 먼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삼세윤회설이다. 삼세윤회설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경문을 하나 살펴보자.



“만일 고의로 지은 업이 있다면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되니 혹은 현세에 받고 혹은 내세에 받는다“

(≪中阿含) 제3권 <思經>).

여기에서 현세와 내세는 죽음으로 갈라진다. 그러므로 이 경문은 죽은 뒤 내세에서는 어떤 방식에 의해서든 과보를 받을 존재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사후 존재를 일단 긍정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우리는 삼세윤회설을 통해 불교가 죽음에 대해 지니는 기본 입장이 단멸론이 아님을 주장할 수 있다.

삼세윤회설을 통해 단멸론적인 견해를 지양한 부처님은 삼법인설을 내세움으로써 이번에는 영혼불멸론적인 입장이 아님도 강조하고 있다. 사후에 영속할 것이라고 상정되는 불멸의 마음이란 일체의 육체적 작용을 통솔하고 모든 인식작용을 종합하는 하나의 주체로서 대개들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를 자아라고 부른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러한 주체를 육근 중에서 의근(意根)에 포섭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의근을 눈, 귀, 코, 혀, 몸과 함께 덧없고 괴로우며 무아(無我)라고 단정하고 있음을 또한 볼 수 있다(≪雜阿含) 제13권). 현실 속에서 관찰해 볼 때 그 의지에는 영속성이란 없으며, 그러한 무상한 변화 앞에서는 주재성(主宰性)도 없기 때문에 참된 자아가 아니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영속하는 불멸의 마음이란 잘못된 견해임을 현실의 관찰로부터 자명한 사실로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삼법인설을 통해 영혼불멸론도 부정하고 삼세윤회설을 통해 단멸론도 부정하였다. 그러면 죽음과 사후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우리는 앞에서 신비롭기 그지없던 인간 개체의 형성이 불행히도 일시적인 ‘형체’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됨을 살폈다. 한순간 성립된 어떤 ‘형체’ 위에 가해진 아집과 그것을 유지하려는 ‘느낌’, ‘생각’, ‘결합’, ‘식별’이라는 일련의 작용이 덩달아 일어남으로써 인간 개체의 시원적인 부분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종적으로 분리된 존재를 붙이는 결합 작용에 이어서 좌우 존재를 자기에게 병합하는 횡적인 결합이 일어난 끝에 현실과 같은 커다란 덩어리를 이루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란 상하 좌우로 오르내리고 흩어지려는 기본 존재들을 한데 결합하고 있는 구조물이며 이 구조물을 이루는 핵심적인 원동력은 바로 ‘결합[行, sam.ska ra]’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 개체의 ‘결합력’이란 기본 존재들이 보이는 분리의 성향을 언제까지나 막고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결합력에는 한계가 있다. 앞서 잠시 언급했 듯이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 존재들은 주변 존재들과 민감한 작용 반응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주변 존재들은 수적인 면에서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 존재의 합보다 월등히 많다. 작용력의 면에서도 인간 개체의 결합력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강하다.

여기서 만일 주변 존재들의 작용이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 존재들에 상응하는 방향으로 주어지면 별문제다. 하지만 주변의 작용은 거의 언제나 인간에게 반하는 방향으로 가해진다. 그리하여 인간 개체를 유지하는 근간적인 결합력과 주변 존재의 반대 작용이 서로 대치되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조성된다.

여기에 주위 존재들의 세력이 월등히 강하므로, 인간의 결합력은 견딜 수 있는 데까지 지탱하다 끝내 한계에 이르고 붕괴해 버리고 만다. 이러한 결합 작용의 종식과 더불어 인간을 구성하던 무수한 기본 존재들도 상하 좌우의 본래적인 위치로 주변 존재의 작용에 따라 오르내리고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결합력의 종식과 함께 큰 덩어리를 이루던 기본 요소들이 본래의 자리로 흩어져 버리는 것이 죽음의 실상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흩어진 기본 존재들이 다시 육계의 모습을 띨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육계 중에 일시적으로 정지한 한 ‘형체’ 위에 다시 아집이 가해진다. 아울러 그 ‘형체’를 지속시키려는 ‘느낌’ ‘생각’ ‘결합’ ‘식별’의 작용이 연이어 일어난다. 그리고 이들이 근간적인 부분이 되면 그것을 중심으로 다시 횡적인 결합 작용이 진행되고 마침내 또 하나의 개체가 형성된다. 그 개체는 다시 주위 존재와의 대치를 견디다 못해 언젠가 또 붕괴되고 만다. 이렇게 계속하여 생사의 바퀴는 돌고 돈다. 이것을 생사윤회라고 한다.

인간을 비롯한 일체 생명체의 삶과 죽음이 이처럼 도식화될 때 우리의 가슴은 무겁기만 하다. 이 생에 닥칠 한 번의 죽음도 그토록 두려웠는데 끝없이 받아야 할 나고 죽음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나아가 오온을 근간으로 삼은 인간은 나고 죽는 것 외에도 병듦과 늙음 및 대인관계, 사회 생활을 통하여 언제나 숱한 ‘괴로움’을 받는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인간의 괴로움은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형체’를 나라고 집착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리고 아집의 존속을 위해 떨어진 기본 존재를 하나의 개체로 ‘합쳐서 쌓아 놓은 것[集起, 集, samudaya]’에서 기인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합쳐 올라 하나의 개체를 고수하며 괴로움을 야기하는 형체, 느낌, 생각, 결합, 식별 등의 다섯 가지 근간 [五蘊]을 ‘멸함’으로써 괴로움의 근원적 극복은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오온의 멸함을 위해서는 올바른 수행의 길이 필요하다. 그 길은 우선 인간의 성립과 죽음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런 뒤 이를 바탕으로 바른 생각, 바른 언어, 바른 직업, 바른 삶, 바른 정진, 바른 기억 등의 일련의 행위를 수습하고 끝으로 바른 삼매에 듦으로써 오온의 멸함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부처님이 도처에서 설하셨던 사성제 및 팔정도의 가르침이다. 사성제의 참뜻을 철저히 파악하고 그에 입각해서 완벽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영겁의 생사고를 뛰어넘을 수 있으며, 그럴 때 또한 생사의 바퀴 대신 불사의 법의 바퀴가 돌아가게 될 가능성을 얻는다.

이상과 같이 육계설middot오온설 및 사제설을 살피면 인간을 철저히 의지적 존재로 규정하는 불교의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죽음마저도 인간 스스로의 선택의 결과라고 했는데 죽음이란 오로지 인간 스스로의 아집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곧 상하 좌우로 움직임이 자유로운 육계〔六界說〕의 한 부분에 ‘나’라는 아집이 발생함으로써 일련의 과정을 거쳐[五蘊說], 죽음에 이르게 되고 나아가 윤회를 겪게 되는데〔四諦說의 苦ㆍ集聖諦〕, 그 최초의 집착은 철저히 인간에게 귀속되는 사건이다. 그리고 결코 외적인 어떤 요인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 사건이다. 나아가 수행을 통하여 죽음 및 윤회의 한계 상황도 극복할 수 있으니〔四諦說의 滅ㆍ道聖諦〕, 이때의 수행도 인간 스스로에 귀속되는 의지적 활동일 뿐 어떤 외적인 결정 요인도 지니지 않는 사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의 인간관이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을 철저히 ‘자유의지적 존재’로 규정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