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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인간관 - 2 인간은 자유의지적 존재

香積 2010. 10. 21. 07:15

2 인간은 자유의지적 존재

결정론적 인간 이해가 만연하던 인도 사상계에서 부처님은 전혀 새로운 입장을 주장하셨다. 곧 인간이란 철저히 자유의지적 존재라고 전제했던 것이다. 그러한 부처님의 입장은 인간을 무엇보다도 ‘육근(六根)’으로 파악하는 데서 알 수 있다. 육근의 가르침은 인간이란 눈, 귀, 코, 혀, 몸, 의지의 여섯 근(根)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근’이라는 말을 먼저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근의 원어는 인드리야(Indriya)인데 이 말은 어원적으로 ‘인드라 신의 권능’을 뜻이고 이차적으로는 주권 또는 왕령(王領)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근이라는 말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근이 바로 인간이라는 뜻을 나타낸 것이 육근의 가르침이니, 눈, 귀, 코, 혀, 몸, 의지의 여섯 개의 근으로 인간은 구성되어 있다고 부처님은 보는 것이다. 인드라 신이 그 어떤 외적인 힘에도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이고 절대적인 힘으로 스스로를 운영해 나가듯, 육근으로서의 인간도 그 어떤 외적 요인에도 결정됨이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운영해 나갈 것임을 잘 표현한다.


육근은 사실 육경(六境)과 짝을 이루고 있는 가르침이다. 육경이란 색 ,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의 여섯 가지 인식 대상을 뜻하는 말이다. 육근이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다라고 할 때 힘과 능력이 미치는 대상은 바로 이 육경이다. 따라서 육근이란 육경과의 관계 속에서 절대적인 힘을 가진 어떤 것이라는 의미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런데 육근과 육경은 함께 쓰이어서 십이처(十二處)를 구성한다. 십이처는 부처님에 의해 일체(一切)의 완벽한 분류로서 규정되어 있다. 곧 “일체 존재란 과연 어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그것은 오직 십이처이다(南傳 相應部 제35 ≪相應)).”라고 답하였다. 이 말씀의 뜻은 우주에 온갖 것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이 존재로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인식하는 것이거나 인식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요청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을 중심으로 비로소 존재한다고 인정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십이처에 모두 포섭되어 남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 우주라는 것이 십이처에 포섭되는 것이라면 이 우주의 존재들은 육근 아니면 육경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곧 우주는 육근과 육경으로 구성되어 있지 그 외는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육근과 육경의 관계를 벗어나는 초월적인 절대신을 상정할 필요도 없고 보이지 않는 숙명적 원리도 전제할 필요가 없다. 단지 물질적 자연물들이 육경이라는 인식 대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육경이라는 자연물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능을 행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자. 그것은 바로 육근이다. 그리고 육근은 바로 인식주체인 것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창조신이나 숙명적 원리와 같은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물질도 육근인 인간 존재들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육근 및 십이처의 가르침이 내리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 우주에는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인간 외적인 어떤 것이 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인간의 삶을 전개해 나가는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선언이 자연스럽게 내려질 뿐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여섯번째 근과 경의 존재를 살펴봐야 한다. 여섯번째의 근과 경인 의근(意根)과 법경(法境)은 원래 인간의 인식에서 종합 작용을 뜻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눈, 귀, 코, 혀, 몸 다섯 근의 개별적 인식 작용을 최종적으로 종합하는 것이 의근이며 색, 소리, 냄새, 맛, 촉감이라는 다섯 경의 개별적 인식 내용이 마지막으로 종합된 내용을 법경이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여섯번째 근과 경의 이름인 의지와 법은 단순한 인식상의 관계를 나타낸 말로만 보기는 어렵다.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과 같은 말들의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인식론적인 대응 관계를 의지와 법에서는 아무래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식론적인 대응 관계만을 나타내려고 한다면 차라리 주관이나 객관과 같은 말이 훨씬 적격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와 법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한 데에는 부처님의 특별한 뜻이 담겨 있음에 틀림없다.

육근과 육경으로 이루어진 이 우주를 좀더 달리 표현해 보면 중생과 자연의 관계라고 표현할 수 있다. 육근을 이루는 눈, 귀, 코, 혀, 몸, 의지는 모두가 중생에 속한 것이며,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은 모두가 자연물의 성질을 띤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육근과 육경에는 놀랄 정도로 뚜렷한 속성의 차이가 드러난다. 즉 중생은 자연에 대해 의지적 작용을 가할 수 있는 데 반해서 자연물에는 그럴 능력이 없다. 자연은 중생의 의지적인 작용에 대해서 다만 반응을 나타낼 뿐이며 의지가 없기 때문에 그 반응은 항상 필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여섯번째 근의 원어인 마나스(manas)와 여섯번째 경의 이름인 다르마(dharma)는 육근과 육경의 이러한 속성과 관계를 너무나도 잘 나타내 준다. ‘마나스’는 ‘만(man)’이라는 동사 어근에서 온 말이다. ‘만’이라는 동사의 의미는 포괄적으로는 ‘생각하다’이지만 고대어인 베다 어에 보면 ‘열망하다’ ‘욕구하다’의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여기서 ‘욕구하다’ ‘열망하다’의 용법이 고대 베다 어에서의 용법이므로 보편적이지 않은 면이 있으나, 부처님이 인도의 언어 전개에서는 베다 어 전통의 말기에 살았던 분임을 감안할 때 부처님은 마나스에서 ‘의지’ ‘욕구’와 같은 의미를 충분히 감안하였으리라고 예측된다.

뿐만 아니라 마나스의 경우 그 복합어들이 주목되는데 그중에서도 의업(意業), 의벌(意罰), 의악행(意惡行), 의행(意行) 등의 용례가 관심을 모은다. 그것은 이 복합어들이 한결같이 행위와의 관련 아래 마나스를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신적인 말인 마나스가 ‘행위’와 밀접한 관련을 보이는 것은, 바로 마나스란 ‘어떤 행위에 대한 의지적 결정’이라는 내면적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마나스에서 의지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육근의 의지적인 속성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다르마(法)는 당시 인도에서도 법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법률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 다시 말하면 ‘필연성’ ‘무의지성’을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다르마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육경 곧 자연의 무의지적 속성 및 필연적 반응의 속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생은 의지적 존재이고 자연은 필연적 반응의 존재이며 우주에는 이 두 종류로 구별되는 속성을 지닌 존재만이 있다. 여기서 우리 인간은 중생에 속한다. 따라서 인간은 철저히 의지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음이 또 한 번 부처님에 의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인간의 주체적 의지는 아무것에도 예속될 수 없는 극히 자유로운 것임을 현실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부처님은 선언하신 셈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부처님은 인간의 행복과 불행, 그리고 죽음이라는 종말적 상황까지도 신이나 숙명에 의해서 또는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의지적 행동에 의해서 초래된 것이라고 설한다. 눈앞의 현실을 극복하고 타개해 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마저도 신이나 숙명 또는 물질적 원리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적 노력에 의해서 성취될 뿐이라고 단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우리 인간이 철저히 자유의지적 존재임을 자각하고, 우리의 의지적 행위가 어떻게 행복과 불행을 부르는지에 대해 부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면 된다. 나아가 인간 스스로의 의지적 활동이 어떻게 죽음마저 야기하고 또한 죽음을 극복해 내는지에 대해서도 부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