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상봉이 높다 해도 하늘 밑에 서 있고
낙동강 물이 깊어도 모래 위로 흐르도다.
원래 묘한 도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으니
내일 차 마실 때 산 눈을 뜨고 보아라.
몸은 이 바른 법을 감추었고
마음은 걸림 없는 등불이다.
모든 법의 공함을 다 비추나니
일체를 모두 환히 보네.
伽倻山高天下立하고 洛東江深沙上流라
元來妙道難可說이오 明月喫茶眼看하라
身是正法藏이오 心爲無碍燈이라
照露諸法空하니 一切皆明見이로다.
밥 먹고 차 마시고 일하고 쉬고 하는 일을 떠나서는 불법이 없습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걸어 다니는 것을 떠나서는 부처도 없고 불법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고생고생하며 불법을 배울 것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단지 차별하자면 육안으로는 볼 수 없고 마음의 눈을 떠야 본다는 것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같이 일어나고 자건마는 육안으로는 보지 못합니다. 주인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울을 의지해 내 얼굴을 보는 것처럼 도닦는 비법에 의지해 주인공을 보려고 하면 힘 안들이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 번,만 번 깨달아도 거울을 의지하지 않고는 내 주인을 볼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여러 사문에게 물으시되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고?”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는 도를 닦지 못할 사람이다.”
다시 사문에게 물으시되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고?”
“밥 먹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대 또한 도를 닦지 못할 사람이다.”
다시 한 사문에게 물으시되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는고?”
“호흡 사이입니다.”
“착하고 착하도다. 가이 도를 닦을 사람이다” 라고 하시었다.
우리의 목숨이 어찌 며칠 사이에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사람은 한 육십년 사이에 있다고 하겠지요. 밥 먹는 사이에 있다고 한 사람은 가까이 대답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도를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새겼지만, 나는 “도를 닦지 못할 사람이다”라고 새겼습니다. 이런데 병폐가 있어요. 쉬운 말인 것 같지만, 이런 곳에서 깨달아 버려 자기 살림살이를 만들어 버리면 공부가 안 될 수 없고 견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숨 한번 쉬는 데 우리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우리는 업보중생이므로 어리석게 몇 십 년, 몇 백 년, 천만 년을 살 것처럼 세상 일을 계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힘을 얻을 수 없고, 도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렵기로 말하면 천상천하 제일 어려운 것이 도이지만, 한편으로는 세수할 때 코 만지고 얼굴 만지기 보다 쉬운 것이 도 아닙니까.
발심하지 못하는데 어려움이 있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 선종문에 삼분단三分段 법문이 있습니다. 동중일여動中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입니다. 이 세 가지 계통 차별적인 법문만 알면 그렇게 신경 쓸 것 없습니다. 물론 이것을 알더라도 선지식은 탁마도 하고 더 알려고 찾아야 하지만 말입니다. 나는 처음 이 삼분단 법문을 모를 때에는, 다른 스님들의 상단법문도 다 알겠고 어떤 스님의 법문 흉내도 자신있게 낼 수 있을 만큼 마음은 도인 같았습니다. 그런데 알쏭 당쏭 의심이 났어요. 그러다가 이 삼분 마다 법문을 안 뒤에는 의심을 버려 버렸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삼분단 법문 세 가지 가운데, 행주좌와 어묵동정 일체처 일체시하느냐, 이것을 요약하면 동정일여가 아닙니까. 일을 할 때나 조용할 때나 공부가 한결 같으냐는 말입니다. 스스로 자기 공부를 양심적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선종문에 제일 귀중한 것은, 똑똑하고 알음알이가 밝은 것이 아니라 진실이 근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껍데기 도인밖에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첫째, 동정일여가 되느냐 안 되느냐를 공부하면서 점검해야 됩니다. 이런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무슨 시비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내 허물이 하늘과 같은데 어찌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수 있느냐 말입니다. 꿈속에서도 공부가 한결같았느냐는 말인데, 두 번째 그 점검을 할줄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숙면일여입니다. 꿈도 없이 잠이 푹 들었을때 주인공이 어디에 있느냐 그 말입니다. 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절대 매하지 않고 여여불전할 때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일을 잘하는 것은 똥으로 금을 만드는 것이고 진흙으로 백옥을 만드는 식이니 거꾸로 살아요. 옳은 일도 옳은 일이 없고 착한 일도 착한 일이 없습니다. 이런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 일의 시시한 일을 가지고 말로 다툽니다. 그래서 나는 조계사에 가면 “법복을 입고 재판을 하는 것이 무슨 수행자냐. 재판할 때 그 스님은 목이 날아간 줄 알아라” 그럽니다. 부처님 법대로 하니 왜 속법을 쓰느냐 말입니다. 부처님 법대로 하면 장로 비구들 앞에서는 계받는 사람들은 언권도 없습니다. 공사가 있더라도 승랍이 몇 해 되지 않은 사람은 언권이 없는 것인데 공사를 하면 그런 사람들이 쑥 나와요. 그래서 그런 법을 가정에서 배웠느냐, 학교, 군대에서 배웠느냐 하고 지금까지 막아냈습니다. 스님이 되었으면 부처님 법을 따르지 왜 속인들의 법을 따릅니까. 그러니 나이 많은 사람이 무슨 일을 주장할때는 자기 고집대로 하지 말고 어째서 그렇게 합니까 하고 물어요. 부처님 법대로 살아야 해인사도 살고 총무원도 사는 겁니다.
지비자가 송하되
부처님께서 인연의 큰일을 말씀하시니
세계가 무너질 때도 그것은 무너지지 않으리
동서남북 조주의 문에 보화가 출입해도 알아채는 이 없네
마음 구슬 언제나 투명하야 어느 곳이나 바추지 아니함이 없구나
정도라 사도라 그 생각을 다 놓으면 능히 옛 부처님 나타나리라
知非子頌하되
佛說因錄一大事하니
世界壞時渠不壞라
東西南北趙州門에 普化出入無人會로다
心珠常瑩徹하야 珷處非不照로다
放下正邪想하면 能入古佛堂이로다.
알고 하면 허물이 없는데, 모르고 하면 그것이 사견심이 되어 버립니다. 무심이 도는 아니지만, 우리는 무심을 배우는 사람이 아닙니까. 옳은 생각, 그른 생각, 착한 생각, 악한 생각도 다 버리라고 했는데. 하루도 시비를 가리지 않고는 살지 못합니다. 시비는 가리되 연극으로, 방편으로 시비를 해요. 옳은 법으로 알고 시비를 하면 중의 목이 달아난다 그 말입니다. 입도 불가피할 때 열어야 합니다. 본 고향 자리에서는 손가락 하나 돌리는 것도 다 죄짓는 일입니다.
홀연히 어떤 사람이 산승에게 묻되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 하면
그에게 아침에 함께 죽을 먹고 나서는 발우를 씻네
忽有人이 問山僧호대
如何是佛法大意오하면
向伊道호대 朝來共喫粥하고 喫了洗鉢盂로다.
#혜암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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