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공부

인과를 초월하는 것이 도입니다(상)

香積 2020. 10. 3.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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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를 초월하는 것이 도입니다.(상)/혜암스님

이 연결은 연결이 아닌 연결이요
이 화합(모임)은 모임이 아닌 모임이더라.
연합이 멸하여 다 한 곳에
뚜렷이 밝은 한 물건은 분명하더라.

모이고 갈리고 하는 것이 본래 본문자리에서 있을 수가 있습니까. 꿈이지요, 꿈. 꿈이 아닌 소식을 알아야 바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고, 산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나고 나는 곳에 이런 짓거리를 해 가지고 수지가 맞겠습니까. 이런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반야심경에 전도몽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거꾸로 산다. 세간과 출세간의 길이 한 길인 동시에 세상의 길은 동쪽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면, 출세간의 법은 분명히 서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속세란 무슨 말입니까.

꿈속에 사는 사람들이고, 죽음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 인생은 죽음으로 가는 날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남는 장사 없습니다. 선악이 몽중사입니다. 선과 악이 모두 둘인 것 같지만 하나인 동시에 모두 꿈속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착한 일을 해도 수지 맞지 않아요. 착한 일이 무엇이냐. 부모에게 효도하고 국왕에게 충신 노릇하고 윗사람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들에게 열녀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효순지도라 합니다. 이만큼 착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중요하니까.

그렇지만 이것도 꿈입니다. 어머니도 죄인, 아버지도 도둑놈, 나도 죄인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도와 주어 봐야 수지가 맞지 않아요. 어머니를 도와 주되 안 보이는 어머니를 도와 주어야 효자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고, 자녀를 도와 주되 눈으로 볼 수 없는 자녀를 도와 주어야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눈 앞의 한 가닥 길인 당처를 지시하라.

마음을 내어 달리 구하면 더욱 더 멀어진다. 분별심으로 도를 구할 수 있습니까. 분별심이 들지 않고 도를 구할 수는 없지만, 분별심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둘도 없는 격 밖의 소식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공부하는 공식은 없습니다. 활구선, 참선을 하는 것이 우리가 살 길로 가는 길이며 바로 잃어 버린 나를 찾는 길입니다. 다른 것이 도가 아닙니다. 이 몸은 부모의 물건이 아닙니까. 나이면서도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몸뚱이도 나와 상관이 없는데 부모하고 나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꿈을 바로 깨시오 이 세상에 은혜 은자, 사랑 애자, 같이 뜨거운 불은 없습니다. 나고 나는 곳에 은혜 은자, 사랑 애자, 이 두 자에 속아 우리가 이런 고생을 밤낮으로 하고 살았습니다. 철저히 무심하여 마음을 모조리 버려 버리면

비로소 여여한 본체를 알아 방해롭지 않더라. 우리의 원수는 자녀들이 원수고, 부모와 일가친척이 원수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첫째 가는 원수는 번뇌망상입니다. 번뇌망상이 뭡니까. 선심 아니면 악심, 악심 아니면 무기심입니다. 두 번째 원수는 이 몸, 이 도둑놈입니다. 몸이 있으니까 괴로운 것이지. 이 몸이 복을 받으려고 가져온 몸이요. 깨치고 보면 한몸뚱이고 한나라이고 한집안이지만, 깨치기 전에는 눈도 도둑놈, 코도 도둑놈, 귀도 나를 괴롭게 하는 도둑놈, 혓바닥도 나를 괴롭게 하는 도둑놈입니다. 어찌 한세상도 아니고 두 세상도 아니고 이런 도둑놈에게 속아서야 되겠소.
산은 위로 올라가고 물은 산꼭대기로 흐르니
수 놓은 비단 휘장 속에 진기한 구슬이 빛나고
저 높은 허공 맑은 하늘에 법의 칼이 번쩍이네
범부와 성인이 어디에 있느냐.
범부와 성인이 어디 있겠느가.
(청중 가운데에 누군가 “여기 있습니다!”하고 소리질러 답한다.)
거기 있다고 한들 거기가 뭐요. 여기 있다는 것은 삼척 동자도 압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요.

부처와 조사도 서지 못하니 서천 28대인의 조사도 훔친 물건을 안고서 ‘낭패다’소리 치며 굴복하고 1709만8인은 두 눈에 모래를 뿌림이로다.

글자나 말을 따라가지고 수지가 맞겠습니까. 비법은 부처님에게도, 육조스님에게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마음 속에 비법이 있는 것입니다.

비밀한 부적을 불 살라 없애 버리고
옛 거울을 부숴 없애 버리며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살리는 일들이 자유자재하니
필경에 이 무슨 도린고?
산호가지 끝에 꽃이 피고 치자 숲 속에 큰 과실이 익었도다

치자 숲 속에 큰 과실이 익을 수 있을까요?
있지.

이 참선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이 교라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교가에서는 중도 이론의 체계를 말씀했던 것이고, 선종에서는 중도의 실천 부분을 말씀했던 것입니다. 오직 불법이라는 것은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요, 실천하기 위한 이론인 것입니다. 담 넘어 소뿔이 보이면 소 한 마리 있는 줄 알아야지 바쁜 세상에 담을 넘어가 소를 보고서야 소가 있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척 알아차려야지.

중국 송나라 때의 일입니다. 명심보감에도 나오는 유명한 정의천 선생이 원행을 떠날 일이 있어 배를 타고 집을 떠나는데, 마침 그 때 누더기를 입은 보잘 것 없는 스님 한 분이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난데 없이 풍랑을 만나 생사를 헤맬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무리 수행이 깊은 정의천 선생일지라도 마음을 어이할 수 없어 태산 같은 걱정을 했고, 다른 사람들도 아우성을 치며 엎어지고 난리였습니다.

그런 중에서는 그 스님은 태연자약하게 걸망을 턱 벗어 목침을 삼고 드러누워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잠을 자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정의천 선생이 아무리 참선을 하는 스님이라도 목숨을 잃을 판에 어떻게 저렇듯 태연자약하게 잠을 잘 수 있는가 감탄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풍파가 멎고 목적지에 이르러, 정의천 선생이”참선하는 스님으로 인정은 하지만, 얼마나 공부가 장하면 죽는 자리에서도 그렇게 태연히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랍니다. “아, 그거야 아무 것도 아닌 일인데 물을 일이 뭐 있소. 나는 일찍이 바다에 나와 바다를 본 일이 없고, 바다를 보지 않은 사람이 배를 탄 일이 있겠소. 바다를 보고 배를 탄 일이 없는데 죽고 사는 일이 어디에 있겠소?”이게 그 스님의 대답입니다. 얼마나 멋진 생활입니까.

생사에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꿈입니다. 우리 자성에는 생사가 아무 관계도 없는 것입니다. 도가 뭡니까? 마음입니다. 잠을 자는 사람에게 꿈이 있고, 잠을 자지 않은 사람에겐 꿈이 없는 것처럼,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슬픈 생각, 무서운 생각, 미워하는 생각,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마음이 우주인데, 전체가 청정법신인데, 분별심이 모두 끊어졌는데, 너도 나도 없어지고 물질도 없어졌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소.

여러분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 시간만 사람인 줄 알지 마시오. 인연법에 의해서 구십여섯 종 외설법을 모두 항복받았습니다. 이 시간만 사람이고 이 시간만 요런 물건을 끌고 다닐 뿐이지, 나는 어머니도 아니고 처녀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요, 속지 마시오.

#혜암스님

2007.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