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절 불교 사상의 형성과 발생 과정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하여 활동했던B.C. 6세기경의 인도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사상적으로 커다란 변화와 전환의 시대였다. B.C. 1000년경 갠지스 강 상류지역에서 농촌을 중심으로 카스트 제도와 제식주의적 세계관에 바탕한 바라문 문화가 확립되었지만, B.C. 800년경엔 철제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갠지스 강 주변의 원시림을 개간하면서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B.C. 6세기 무렵엔 갠지스 강의 중류, 하류 지역까지 개간되었다. B.C. 1000년 무렵엔 인도 문화의 중심이 갠지스 강 상류, 지금의 델리 부근이었다면, 불교가 발생했던B.C. 6세기경엔 갠지스 강 중류 지역이 인도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와 더불어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발달한 철제 농기구와 갠지스 강 유역의 비옥한 땅은 풍부한 농산물의 생산을 가능케 했고 잉여 농산물에 바탕하여 상공업과 화폐 경제가 발달하였다. 폐쇄적이고 봉건적인 농촌 중심 사회에서 새로운 지역으로 개척해 들어가면서 원주민과의 혼혈도 빈번해졌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형성에 따라 바라문 중심의 사성계급 제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바라문의 절대적 권위, 제식만능주의, 베다의 절대적 신성성에 대해서도 회의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정치적으로는 종전의 촌락을 바탕으로 한 부족장 중심제에서 점차 도시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 혹은 공화제로 바뀌어 갔다. 라자(Raja)라고 불리는 군주들끼리의 영토와 권력 확대를 위한 싸움이 빈번해졌고 그 결과 군소의 부족들이 강대한 국가로 통합되었다. 초기불전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의 인도에는 16대국이 있었으며, 대부분이 중부 인도의 갠지스 강 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16대국 가운데서도 국력이 강했던 나라는 마가다, 코살라, 밤사, 아반티의 네 군주국이었고, 주변의 군소 국가들은 점차로 이들에게 합병되어 갔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태어난 카필라 왕국도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시 코살라 국에 의해 멸망되었다. 이 대국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번성했으며, 당시 특히 번성했던 대도시로서 참파, 라자가하(왕사성), 사바티(사위성), 코삼비, 사케타, 바라나시의6대 도시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종래의 바라문을 정점으로 한 사회구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제식만능주의적 세계관이 지배했던 농촌 중심 사회에선 브라흐마나(바라문, 사제), 크샤트리야(찰제리, 정치가, 군인), 바이샤(서민, 생산자), 수드라(노비)의 순서로 위계질서가 이루어졌으나, 새로운 시대에선 막대한 권력을 쥔 왕과 커다란 재산을 소유한 부호(長者)가 사회의 실권을 가진 가장 높은 신분으로 부상했다. 그만큼 새시대에선 바라문과 베다, 그리고 제사의 절대적 권위와 권능에 대한 믿음이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불전에선 종래의 바라문, 크샤트리야, 바이샤, 수드라의 순서가 크샤트리야, 바라문, 바이샤, 수드라의 순서로 바뀌어 기술되어 있다.
이미 우파니샤드기(期)에 오면 철학적, 종교적 탐구가 바라문의 전유물이 아니고 크샤트리야나 여성들도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지만, B.C. 6세기경엔 진리의 탐구에 있어서 이미 계급적 제한을 받지 않고 어느 계층에서나 철학자나 구도자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것은 진리와 지혜는 계급을 초월한 가치라는 인식이 확산되었음을 뜻한다. 그러한 시대정신 속에서 바라문이 아닌 크샤트리야 출신의 ‘고타마 사문’이 붓다(Buddha, 覺者)로서 인정받고 거대한 교단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이자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 나타풋타(혹은 마하비라)도 크샤트리야 출신이었다.
제사 행위가 우주의 근원적인 힘인 브라흐만을 통제하고 획득하는 방법이며, 따라서 제사행위를 독점한 바라문만이 그 힘의 비밀을 쥐고 있다는 신념에 대한 회의는B.C. 800년 무렵부터 시작되는 우파니샤드에서 서서히 붕괴되어 갔으며, 우파니샤드의 철인들은 그 절대적 힘과 지고의 가치인 브라흐만(梵)이 외적인 제사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실재하는 참 나(眞我), 즉 아트만에 대한 인식(智), 즉 자각에 의해 실현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바라문의 베다 문화 자체에서도 낡은 가치와 사고방식에 대한 도전과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던B.C. 6세기경의 중부 인도는 베다 문화의 흐름에 대립되는 새로운 사상운동이 일어났던 시대이기도 했다. 전통과 정통적 문화에 대한 일종의 반(反)문화(counter-culture) 운동을 주도했던 그룹을 사문(沙門, raman.a)이라고 부른다.
불전에서도 바라문과 사문을 나란히 열거하고 있는데 당시 사문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바라문에 대해 새로운 시대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진보적인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이들은 가정과 사회에 대한 일상적, 세속적인 의무와 책임을 벗어버리고 재가자들의 시여(施輿, 탁발)에 의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면서 진리를 탐구하고 가르치며, 논쟁하면서 돌아다니는 출가유행자(파리브라자카)들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가하기 전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일화 가운데 마지막 성문 밖에서 목격한 광경이 바로 생사의 고(苦)를 벗어나기 위해 출가유행하는 사문이었고, 석가모니 부처님 자신도 그 후 세속을 등지고 사문이 되어6년간의 탐구 끝에 붓다가 되었다.
당시의 인도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무제한적으로 보장되었으므로 수많은 사문들에 의해 각양각색의 사상들이 주장되었다. 불전(梵網經)에서는 그것을 62견(見)으로 자이나 문헌에선 363견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내용엔 윤회와 업을 인정하는 견해, 윤회와 업을 부정하는 견해, 해탈과 열반의 상태에 대한 문제, 회의론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62견, 363견의 경우는 그 견해를 주장한 사람의 이름이 전하지 않으며, 사문과경(沙門果經)에서 석가모니 부처님 외의 다른 여섯 사문들의 사상을 기술해 주고 있다. 이들을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부르며, 모두 특색 있는 주장을 표명한 자유사상가들이다. 이들도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이 각자의 교단을 이끌었고, 추종자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다음에 이들 육사외도의 사상에 대해 간략히 기술한다.
① 도덕부정론 :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푸라나 카사파는 인과업보를 부정하는 주장을 폈다. 그는 살생, 도둑질, 간음, 거짓말 등을 행해도 악을 짓는 것이 아니고 악의 과보도 발생하지 않으며, 반대로 보시를 하고 제사드리고 감관(感關)을 제어하고 진실을 말해도 선행이 아니고, 또 선의 과보를 받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도덕부정론은 그 외에도 많은 사상가들이 주장했으며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② 숙명론 : 아지비카(A jvka)교파의 개조인 막칼리 고살라는 모든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결정된 숙명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체의 생명체가 윤회를 계속하는 것도, 또 그들이 청정하게 되고 해탈하는 것도 원인이 없는 것이며, 다만 자연의 결정과 상황과 천성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한다.
고살라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 허공, 영혼, 득(得), 실(失), 고, 낙(樂), 생, 사의 열두 가지 요소를 생명체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여겼다. 비록 영혼을 인정하긴 했지만, 그것도 원자(原子)와 같은 것이라고 본 점에서 유물론적이다.
그가 속한 교단의 명칭인 ‘아지비카’는 원래 생활법을 의미하지만 교단의 명칭으로서는 ‘생활법에 관한 규정을 엄밀히 준수하는 자’라는 뜻이고, 다른 교파에서는 ‘생계수단으로서 고행하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한역 경전에서는 사명외도(邪命外道)라고 번역했다.
이 교파는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에는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으며, 후대의 아쇼카 비문에서도 불교나 자이나교도와 나란히 독립된 종교로 인정하였고, 마우리아 왕조 시대까지 교세를 유지했으나 그 뒤엔 자이나교에 흡수되었다.
③ 유물론 : 아지타 케사캄발린은 모든 것이 지, 수, 화, 풍의 네 원소와 그리고 이들 원소가 활동하는 장소로서 허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영혼 따위는 없으며, 인간은 죽으면 신체를 구성하는 네 원소가 각각 자연계로 환원한다고 보았다. 오직 현세뿐이고 내세는 없으며,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다.
존재론적으론 유물론이고, 인식론적으로는 감각론이며, 실천적으로 쾌락주의인 아지타의 사상은 푸라나의 도덕부정론에 대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로야타(Loka yata), 혹은 차르와카(Ca rva ka)파로 불리는 이 파는 한역 불전에선 순세외도(順世外道)라고 번역한다.
④ 7요소설 : 파쿠다 카차야나는 지, 수, 화, 풍의 네 요소 외에 고, 낙, 영혼을 더해7요소를 인정했으나 이 영혼도 물질적인 것이므로 그의 사상도 유물론적이다. 7요소는 만들어진 것도, 또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일도 없으며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다. 그러므로 설사 사람을 칼로 베어도 칼은 다만7요소 사이를 통과하는 것 뿐이며,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⑤ 회의론 : 인간의 인식능력에 대한 비판 없이 진리 주장을 하는 독단론에 대해 산자야는 ‘내세가 있는가?’ ‘선악업의 과보는 존재하는가?’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그런 것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확정적인 판단을 유보하고 애매한 답변을 하므로 ‘미꾸라지처럼 미끌미끌하여 잡히지 않는 설’이라고 불렸다. 불교의 62견 가운데는 네 가지 견해, 그리고 자이나교의 363견에서는 67종이 불가지론임을 미루어 당시 인식능력에 대해 회의한 사상가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서 사리불과 목건련도 처음엔 산자야의 제자였다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부처님에게 귀의했다고 한다.
경험의 범위를 넘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기설(無記說)은 산자야로 대표되는 회의설에 바탕하여 그것을 뛰어넘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⑥ 자이나교 : 자이나교의 개조인 니간타 나타풋다의 본명은 와르다마나이고, 깨달음을 얻은 후엔 마하비라(큰 영웅) 혹은 지나(승리자)라고 존칭되었다. 그의 생애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유사하여 비슷한 시대에 밧지 국의 베살리에서 왕족의 아들로 태어나 30세에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고, 12년의 고행 끝에 완전지(完全智)를 성취하여 그 후30년간 교화활동을 펴다가 72세에 입적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활동무대도 같고, 교리용어나 교단구성에서도 공통점이 많으며 경전도 빨리 어와 같은 계통의 속어(프라크리트 어)인 아르다 마가디 어로 씌어졌다.
그러나 사상적으론 다른 점이 많다. 모든 존재를 영혼(지바)과 비영혼(아지바)으로 나누고 비영혼은 다시 다르마(운동의 조건), 아다르마(정지의 조건), 허공, 물질로 나눈다. 영혼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과 달리 상주변재하는 단일자가 아니라 다수이며 업에 따라 신체에 한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업(카르마)은 미세한 물질로서 외부에서 신체로 유입되어 영혼에 부착됨으로써 그것을 윤회에 속박시킨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미세한 업의 물질이 영혼에 부착되는 것을 막아야 하며, 그 방법은 계율을 엄격히 지키고 고행을 하는 것이다. 출가 수행자는 불살생, 진실어, 불투도, 불사음, 무소유의 다섯 가지 계를 지켜야 하는데, 그 결과로 자이나교 특유의 종교적 관습이 생겨났다. 땅바닥의 벌레를 밟지 않도록 비를 들고 다니며, 공기 중의 미생물을 마셔서 죽이지 않도록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또 무소유계를 지키기 위해 옷을 입지 않는 수행자도 있다. 이 때문에 불전에선 나형외도(裸形外道)라 부르기도 한다. 현재는 흰 옷을 입는 백의파와 옷을 입지 않는 공의파로 갈라져 있다. 자이나교는 인식론적으로 상대주의 입장을 취한다. 즉 모든 판단이나 견해는 특정한 관점에서의 일면적 진리이므로 반드시 ‘한 점에서는’이라는 단서를 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산자야의 회의론에 대한 자이나교적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자이나교는 이미 마하비라 재세시 튼튼한 교단을 형성했고, 그 후 힌두교, 불교와 더불어 인도의3대 종교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인도에는3백만 정도의 신도가 있으며, 비록 소수이긴 하나 불살생계를 지키고자 신도들이 농업을 버리고 일찍부터 상업을 주업으로 해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유하다.
이상에서 육사외도의 사상을 간략히 조망해 보았는데, 전체적으로 흐르는 몇 가지 사상적 경향이 있다. 먼저 이들은 세계와 인간이 다수의 요소나 원리로 구성된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브라흐만이라는 하나의 원리로부터 이 세계가 전개되었다는 바라문교의 전변설(轉變說)에 대해 다양한 요소가 결합하여 세계를 구성한다는 적취설(積聚說)을 주장하였다.
구성요소 가운데는 심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도 원자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유물론적인 색체가 짙다. 유물론에 바탕하여 인과업보나 내세, 윤회를 부정하는 도덕부정론적 경향도 이들의 공통점이다.
인식론적으로 희의론과 상대주의도 전통적 가치와 사고방식이 붕괴되어 가는 새로운 시대에 나타날 수 있는 사상이다.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대립되는 태도가 공존하였다. 유물론과 연계되는 쾌락주의는 추종자가 많지는 않지만 도시 중심적인 당시 사회의 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불교와 육사외도의 사상과 비교해 보면 양자가 베다와 바라문과 제사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한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여러 점에서 입장의 차이가 발견된다. 우선 적취설에 대해 불교는 실체가 없는 사물들이 상호 의존하여 생멸한다는 연기설(緣起說)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불교는 인과업보와 내세와 윤회, 그리고 윤회로부터 해탈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이런 점에선 베다에 속하는 우파니샤드와 견해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인식론적인 면에서 불교는 회의론이나 상대주의에 대해 극히 실제적이고 실용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무기설(無記說), 즉 형이상학적 논쟁의 무용성을 주장한다. 또 실천적으로는 쾌락주의와 고행주의의 양극단을 지양한 중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는 바라문에 대립되는 사문운동의 흐름 속에서 탄생했지만, 다른 사문들의 사고나 가치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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