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적 배경
인도 문화와 불교의 특성
한국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고 발전하여 중국의 한문으로 번역되고 중국적 사고방식에 의해 변형된 중국불교를 수입한 것이다. 불교는 본래 유연하고 동화력이 강한 종교이므로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양하고 특성 있게 발전한다는 것은 불교를 풍부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장점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본질과 뿌리까지 달라질 수는 없다. 중국불교나 한국불교도 근원지는 인도불교이고, 불교의 개조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인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인인 우리가 한국의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도로 거슬러 올라가서 근원에서부터 재고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B.C. 6~5세기경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태어나 활동했을 때 인도는 이미 인도-아리안 족의 베다 문화가 천년 가까운 동안 발전했고, 또 인도-아리안 족이B.C. 1500년경부터 서북인도로 이주해 오기 전에 다시 천년이 넘도록 고도로 발달한 도시문명을 창조하고 누렸던 원주민의 인더스 문명이 있었다. 그러므로 불교가 발생하기 이전에 인도는 이미2천 년이 넘는 오랜 문화를 갖고 있었고 그러한 문화적, 사회적 토양과 배경 속에서 불교가 탄생한 것이다. 불교는 결코 마른 하늘에 번개치듯 ‘고타마 사문(沙門)’이라는 한 천재의 독창력에 의해 돌연히 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 모든 현상이 연기법(緣起法)에 따른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불교의 발생도 많은 인(因)과 연(緣)의 작용에 의해서 가능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교를 바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불교와 인도의 사상적 전통이 갖는 관계를 무시하고 불교만을 따로 떼어서 보려는 경향에서 벗어나 연기론적 사고방법으로써 불교의 발생 및 발전의 배경이 되는 인도의 문화와 전통들을 선입견 없는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절 불교의 역사적 배경
1 문화적 배경─인더스 문명
1921년 죤 마살 경(卿)이 인더스 문명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이래 하랍파와 모헨조다로를 비롯해서 300여 군데서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남으로 봄베이, 북으로 히말라야, 동으로 델리에 이르는 인더스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화나 고대 이집트 문화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고대문명 가운데서 가장 발달한 것으로 평가한다.
B.C. 3000년에서B.C. 1500년 사이에 존속했던 인더스 문명은 아리안 족의 베다 문화와 달리 문헌의 형태로 전해지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발굴된 유물과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으로 그 실상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하랍파와 모헨조다로의 유적은 인더스 인들이 당시의 고대문명 가운데서 가장 발달한 도시문명을 건설했음을 보여준다. 두 도시는 모두 서편 둔덕에 세워진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와 저지대의 시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두 도시가 모두 잘 통제된 계획도시라는 점이다. 시가지는 주요 도로가 바둑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고, 구운 벽돌을 건축자재로 사용했다. 도시계획이나 거대한 곡물창고와 성채로 보아 중앙집권적 통치기구와 능률적인 행정조직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잘 지어진 거대한 공중 목욕소와 하수처리 시설, 그리고 위생시설이다. 집집마다 목욕탕과 하수시설을 갖춘 것으로 보아 이들이 목욕과 청결을 중요시했으며, 모종의 종교적 의식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더스 문명의 비밀의 일부를 드러내주는 다른 열쇠는 많은 양의 수공품들이다. 그 가운데는 몇 개의 돌조각과 청동조각이 발견되며, 종교와 관련된 수많은 진흙 조형(테라코타), 그리고 돌을 깎아 만든 인장(印章)들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장기판과 십진법을 사용한 정확한 측량도구, 그리고 어린이의 장난감도 보인다.
테라코타 조형의 주요 소재는 동물의 수컷, 특히 황소이며, 인물조형의 경우는 반대로 다산(多産)과 관련된 여성의 모습이다. 진흙 조형보다 더 중요한 자료는 인더스의 신앙과 종교의식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형상을 새긴 돌로 만들어진 인장들이다. 인장에는 인더스의 문자가 새겨져 있으나 아직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또 인더스 인장이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발견되어 인더스 인들이 메소포타미아와 무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장에 새겨진 그림의 소재도 테라코타와 마찬가지로 동물의 수컷인데, 황소, 외뿔 가진 무소, 호랑이, 코끼리, 영양, 악어 그리고 신화적인 상상의 동물도 발견된다. 한 인장에선 물소 앞에 일렬로 엎드려 절을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이러한 동물들이 단순히 공예를 위한 소재가 아니라 종교적 예배와 의식의 대상임을 말해 준다. 동물들이 모두 수컷이고 또 뿔 달린 동물을 즐겨 묘사한 것으로 보아 이들이 자연의 힘, 내지는 남성적 생식력, 생명의 힘을 상징한다고 보인다. 이러한 동물들에 대한 예배의식을 통해 예배자도 그러한 힘을 받기를 기원했던 것 같다.
동물뿐만 아니라 신이나 사제(司祭)로 보이는 남성의 모습도 보인다. 머리에 뿔이 달린 장식을 하고, 낮은 평상 위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으며, 왼편엔 코끼리와 호랑이가, 오른편엔 외뿔소와 물소가 그리고 정면 밑에는 역시 뿔 달린 동물들이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동물의 주인이거나 신적인 존재로 추정된다. 동물과 더불어 나무도 성스러운 것으로서 예배 대상이 된 듯하다. 한 인장에선 길게 머리를 늘어뜨리고 높다란 머리장식을 한 남자가 나무 밑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데 뒤에서 거대한 염소가 굽어보고 있는 장면이 있다. 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인물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예배자를 두 마리의 코브라가 뒤에서 지키고 있는 모습이 조각된 인장도 있다.
뿔 달린 동물의 수컷이나, 남근이 발기된 상태에서 뿔 달린 머리장식을 한 남성상은 모두 자연의 생산력 혹은 생명력을 나타낸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좋은 증거는 인더스 부지에서 발굴된 많은 양의 돌로 만든 링가(linga : 男根)상이다.
동물의 수컷이나 뿔, 링가 등이 상징하는 남성적 힘과 성력(性力)에 대한 숭배가 주로 상위 계층의 종교였다면 풍요와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여성신, 혹은 지모신(地母神)에 대한 신앙은 대중과 가정적 차원에서 행해졌던 것 같다.
한때 영화를 누렸던 인더스 문명도 BC 1600년경엔 지진이나 강물의 범람 등 확인되지 않는 어떤 원인으로 몰락의 길에 들어섰고, B.C. 1500년경 아리안 족이 침입하기 시작했을 땐 이미 인더스 문명의 생명력이 다해 가고 있었다. 철제무기와 말이 끄는 전차를 사용했던 유목민인 아리안 족은 큰 어려움 없이 원주민을 정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더스의 도시가 몰락했다고 문화까지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더스 문명은 민중 속에 살아남아 갠지스 강 유역이나 남인도로 확산되었다. 비록 정복당했지만 인더스 문화는 아리안 족 문화에 영향을 주어 베다 문화의 변화를 초래했으며, 아리안 문화와 혼융하여 더 커다란 종합을 이루었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인장의 조각은 베다나 불교문화의 핵심인 요가나 선정의 모습으로 되살아났으며, 성스러운 뱀의 수호를 받으면서 보리수 밑에 앉아 명상에 잠긴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에서도 인더스 문명의 영향이 뚜렷하게 전해지고 있다.
인더스의 종교는 베다 문화가 대중화된 힌두교에서 시바(siva)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위대한 요기(yogi : 요가수행자)이자 동물의 주(主)인 시바는 수소 난디를 타고 다니며, 우주적 창조력의 상징인 링가로 표상된다. 또 정화(淨化)의 의식인 목욕하는 관행도 아리안 족의 문화가 아니며 인더스 문명의 영향이라고 보인다.
2 종교 및 철학적 배경─베다(veda) 사상
베다 문화를 창조한 인도-아리안 족은 오늘날 이란이나 러시아, 그리고 유럽 인과 같은 조상을 가진 민족으로서, 모두 인구어족(印歐語族 : 인도 유럽 어족)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인도문화의 주류는 베다를 원류로 하는 산스크리트 문화이며, 산스크리트(Sanskrit, 梵語)는 희랍 어, 라틴 어, 페르시아 어와 더불어 인구어의 가장 오랜 형태의 하나이다.
인구어의 모형(母型)을 사용하던 인도-아리안 족의 조상들은B.C. 3000년경 카스피아 해(海)와 흑해(黑海)사이의 지역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확실치 않은 원인(자연재해로 추정됨)으로B.C. 2000년경부터 흩어져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무리는 서방으로 향해 이들이 오늘날 유럽 인의 선조가 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동방으로 향하였고 서(西) 투르키스탄의 초원지대에서 수세기 거주했던 듯하다. 이들은 페르시아 어와 산스크리트 어의 모어(母語)인 인도-이란 어를 사용했던 페르시아 인과 인도-아리안 인의 조상이다. 그 후 이들 중 한 무리는 서남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의 이란 땅에 들어가 아리안계 이란 인의 선조가 되었고, 다른 한 무리는B.C. 1500년경 힌두쿠쉬 산맥을 넘어 인도 서북부의 펀잡(Punjab, 五河) 지방에 들어왔다. 이들이 바로 베다 문화의 주역인 인도-아리안 족이다.
많은 유물, 유적을 남긴 인더스 문명과 대조적으로 초기 인도-아리안 인의 유물이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므로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는 인구어로 전해하는 가장 오래 된 종교 문헌인 『리그 베다』뿐이다.
이것에 의하면, 인도-아리안 족은 반야만적인 유목민족으로서 육식과 술을 먹었으며 춤과 노래를 즐겼던 현실적이고 낙천적인 기질의 민족이었다. 손잡이 달린 도끼와 긴 활, 그리고 말이 끄는 수레를 전투에 사용했다. 도시와 벽으로 둘러싸인 성채를 건축했던 원주민보다 문화적으로 뒤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침입할 당시 인더스 문명이 이미 쇠락기에 접어들었다는 점도 있지만, 유목생활과 오랜 이동생활에서 단련된 체력, 말이 끄는 전차의 사용, 호전적인 무인 기질 등도 그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원주민은 피부 빛이 검다는 의미의 ‘다사스(dasas)’로 불렸으며, 후대에 ‘다사’가 노비의 뜻으로 바뀐 것으로 미루어 선주민이4성계급의 마지막인 수드라의 신분으로 전락했다고 추정된다.
모계 중심적이고 풍요를 위해 지모신(地母神)을 숭배하며 농업에 경제적 기반을 두었던 원주민과 대조적으로 인도-아리안 족은 가부장적, 부계 중심적 대가족제도를 유지했으며, 딸보다 아들을 선호했다. 이런 습속은 오늘날 힌두 사회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도시문명을 발전시켰던 원주민과 달리 인도-아리안 족은 촌락을 기반으로 하면서 목축을 주업으로 한 소박한 생활을 영위했으며, 벽돌을 굽거나 진흙을 구워 만든 조상이나 목욕탕, 하수시설도 없었고, 인장이나 도기(陶器)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힌두쿠쉬 산맥을 넘을 때 그들 특유의 몇 가지 문화를 인도로 들여왔다. 그것은 새로운 신들과 그들에게 바치는 찬가(讚歌), 그 찬가를 외우고 낭송하며, 신들에 대한 제사를 담당하는 전문가(이들이 후에 바라문 계급이 됨), 그리고 ‘소마(soma)’라고 부르는 정체 불명의 환각제(이것을 복용함으로써 르쉬[仙人]는 몰아지경에서 신들과 소통하고 찬가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가부장적인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 사제촵무사촵서민으로 구성된3계급의 사회구조,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스크리트라는 정교하고 과학적인 언어 등이다.
초기 인도-아리안 족의 종교는 하늘, 태양, 바람, 폭풍, 비, 불, 번개 등 자연현상이 갖는 힘을 상징하는 자연신들(天, deva)에게 제화(祭火, 아그니)를 피우고 우유, 버터, 소마 등을 바치면서 찬가(리트)를 부르고, 신들이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드리거나 신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은혜를 빌었다. 그 기도의 내용 역시 무병장수, 가축의 번식, 자손의 번영, 전쟁에서의 승리 등 매우 현실적이고 소박한 것이었다. 신들에 대한 이러한 찬가들은B.C. 1200∼1000년 사이에 점차로 『리그 베다』의 형태로 편집되었다.
1 베다 문헌
아리안 인이 창조한 문화를 선주민의 인더스 문명에 대해 베다 문화라고 부른다. 어원적으로 ‘베다’(Veda)는 ‘알다’라는 의미의 어근 ‘vid’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지식’을 뜻하며 베다 문헌을 ‘지식서’라고 번역한다. 베다는 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도-아리안 인들의 탐구와 이해의 결과를 집성한 것으로서 힌두교에서는 그것을 인간의 저작이 아니라 신비적 직관력을 가진 르쉬(聖仙, r.s.i)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서, 즉 쉬루티(′sruti)라고 믿는다.
최초로 형성된 베다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신들에 대한 찬가를 모은 『리그 베다』이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베다란 리그 베다 시대로부터 시작해서 그 후 천여 년 이상의 긴 세월을 거치면서 서서히 형성되어 온 방대한 문헌의 기록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사의 절차와 형식이 점차 복잡해졌고, 제사의 의미나 성격도 크게 달라져 갔다. 제사가 복잡해짐에 따라 여러 명의 사제가 역할을 분담했다. 『리그 베다』의 찬가는 신을 제단에 초청하는 권청승(勸請僧, hotr.)에게 속했고, 제구를 다루고 제사의 실무를 주관하는 행제승(行祭僧, adhvarya)이 제행에 따라 그에 적합한 제사(祭詞, yajus)를 읊었으며, 그 제사를 모은 것이 『야주르 베다』가 되었다.
그리고 『리그 베다』 가운데서 선정된 찬가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로써 신을 찬미하는 가영승(歌詠僧, udga죚tr.)이 있으며, 그 노래의 모음이 『사마 베다』다. 처음엔 베다란 이 셋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차츰 민간 사이에서 행해졌던 재앙을 쫓고 복을 부르는 여러 가지 주문들을 모은 『아타르바 베다』가 제4의 베다로 추가되었고, 이것은 제사를 총감독하는 브라흐마나 승(僧)이 주관했다.
이상의4베다는 제사행위에 직접 사용되는 찬가, 노래, 제문, 주문들의 ‘집록’이라는 의미로 상히타(本集, sam.hita)라고 한다.
브라흐마나는B.C. 1500년경부터 수세기간 인도 서북부에 머무르면서 『리그 베다』을 편집했던 아리안족이B.C. 1000년경엔 남동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델리 부근 즉 갠지스 강과 야무나 강 사이의 평원으로 내려온 후에 제작된 문헌이다. 이때는 바라문(사제계급), 크샤트리아(귀족계급), 바이샤(생산자)의 세 계급과 주로 아리안에게 정복된 원주민으로 구성된 수드라(노예계급)가 첨가된 사성제도(四姓制度)가 확립되었고, ‘사성제도’의 정점을 차지하는 바라문 사제들에 의해 제작된 제사 의식에 관한 문헌이 브라흐마나다.
아란야카는 힌두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네 단계, 즉 학습기(學習期), 가장기(家長期), 삼림기(森林期), 유행기(遊行期) 가운데 삼림기에 있는 바라문들이 만든 문헌으로서, 실제의 제의 대신 제의를 상징화하고 내면화시켜 제사의 의미를 재해석한 문헌이다. 이것은 브라흐마나에서 우파니샤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중간단계를 점한다.
B.C. 800년경부터 아리안 인은 갠지스 강을 따라 더욱 동쪽으로 이동하였고 바라문 중심, 제사(祭祀) 중심의 사고에서 점차 벗어나 형이상학적, 종교적 문제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수세기 간의 철학적, 종교적 모색의 결과를 모은 것이 우파니샤드다. 다음엔 베다의 사상을 우파니샤드 이전과 우파니샤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2 우파니샤드 이전의 사상
1) 『리그 베다』의 신관(神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종교 문헌인 『리그 베다』는 신(deva)들을 찬미한1,017개의 찬가 (r.c) 이루어져 있다. 한역 불전에선 천(天) 혹은 제천(諸天)으로 번역되는 ‘데바(deva)’는 ‘빛나다’라는 의미의 어근d v로부터 파생한 명사로서 라틴 어의 데오(deo)와 같은 어원이다.
신들의 거처는 보통 천(天), 공(空), 지(地)의 세 영역으로 나뉘어져 형식적으로 33천이라고 말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불의 신 아그니(Agni), 태양의 신 수르야(S죚vrya) 혹은 사위트르(Savitr.), 번개와 전투의 신 인드라(Indra), 소마(Soma), 새벽의 여신 우샤스(Us.as), 사법(司法)신인 와루나(Varuna), 언어의 여신 와츠(V죚ac), 하늘의 신 디아우스 피트르(Dyaus pitr.), 대지의 여신 프르티위(pr.thv ), 폭풍의 신 루드라(Rudra), 강물의 여신 사라스와티(Sarasvat ), 바람의 신 마루트(Marut), 우정의 신 미트라(Mitra), 조상의 신 야마(Yama) 등이 있다. 이들은 인간의 삶에 밀접히 연관되어 우리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경이롭고 신비한 힘들을 상징화하고 신격화한 것이다. 『리그 베다』는 그러한 상징화된 힘들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경외하여 우유와 버터, 소마 등을 바치면서 읊은 노래들의 기록들이다.
예를 들어 아그니 신은 베다 종교의 중심인 화제(火祭)의 신으로서, 소박한 베다 인들의 심성에 불은 경이롭고 두려운 힘으로 비췄다. 그것은 번개가 되어 하늘과 땅 사이를 가르면서 양자를 결합시키는가 하면, 때로는 숲과 동물과 인간을 태우기도 하고, 고기와 야채를 음식으로 바꿈으로써 인간에게 삶의 에너지를 공급해 주며, 무엇보다 제사에선 신들에게 바치는 공물을 연기의 형태로 신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러므로 『리그 베다』 찬가의1/3가까이 아그니를 언급하고 있다.
소마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식물에서 추출된 환각물질로서 『리그 베다』의 시인들은 이것을 복용한 후 특수한 의식상태에서 신들과 소통하고 찬가를 읊기도 했는데, 소마 신도 그 물질이 갖는 힘을 상징화한 것이다.
불전(佛典)에서 제석천(帝釋天)으로 불리는 번개의 신 인드라는 인간을 해악으로부터 방어해 주고, 적을 정복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며, 생명의 원천인 물을 방출해 주는 신으로서 『리그 베다』에서 가장 자주 언급하고 있다.
언어의 여신 와츠는 언어와 그것의 바탕인 의식이 사회적 소통과 인간에 대해 갖는 경이로운 힘을 신격화한 것이다. 여신 우샤스는 하늘의 딸이며, 태양의 신부로서 밤의 어둠을 뚫고 나타날 태양 빛을 예기하며 희망과 기쁨을 상징한다. 또 우샤스는 잠재적 상태에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둠과 혼돈으로부터 창조와 존재로의 이행을 상징하며, 또 모든 생명의 창조자인 태양(수르야 신)과의 재결합에 대한 희망을 나타낸다.
만물을 뒤덮고 떠받치는 하늘과 대지가 갖는 경외로운 힘은 각각 디아우스 피트리와 프리티위로 신격화되었다. 디아우스 피트리는 희랍 신화의 제우스 파테르, 로마 신화의 쥬피터와 같은 근원을 갖는 신이다.
하늘과 땅 사이를 매개하는 허공의 신인 와루나는 우주의 신성한 이법(理法)인 르타(r.ta)를 수호하는 사법신이다. 르타는 희랍 철학의 로고스에 상응하는 관념으로서 우주적 에너지에 리듬과 조화를 부여함으로써 이 세계가 혼돈과 무질서와 파괴로 나가지 않도록 통제하는 힘이다.
이렇게 존재의 기본적인 힘들을 신격화하여 이들을 찬탄하고 기뻐하고 제사드리는 것이 『리그 베다』의 종교로서, 이런 면에서 다신교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베다 인들은 이러한 신들과 여신들을 찬양하고 희생제를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이런 존재들 너머 더욱 근원적인 실재가 있다고 믿었다. 신성한 이법인 르타는 신들과 여신들도 그에 따라야 하는 보다 근원적인 힘이었다. 그러므로 신들에 대한 제의(yaj~na, 야냐)도 르타와 상응할 때는 신들의 도움이나 방해와 상관없이 바라는 결과가 일어난다고 믿었다. 르따의 통제적 측면이 사회에 적용된 것이 다르마(dharma)이며, 후대엔 제사를 다르마와 동어어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신들을 넘어선 보다 근원적 존재에 대한 모색의 결과로 모든 신들을 하나로 구현한 위슈와카르만(Visvakarman, 만유의 조형자), 프라쟈파티(Praj죚qpati, 피조물의 주), 브라흐마나스파티(Brahman.aspati, 기도의 주)와 같은 추상적인 신 개념이 등장했으며, 더 나아가 인격성을 배제한 형이상학적 일원론으로까지 나아갔다. 『리그 베다』에선 “현인들은 단일자(Ekam-sat)를 많은 이름으로 부른다.”라고 말하며, “현자들은 일자(一者, Ekam)를 아그니, 야마 혹은 마타리슈완 등 많은 형태로 표현한다.”라고도 말한다.
이와 같이 다수의 신들이 하나의 동일한 실재의 다른 측면이라는 사상 때문에 베다의 선인들은 하나의 신을 다른 신들과 동일화시킬 수 있었고 다른 신들에 대해 관대할 수 있었다. 또한 신을 찬양드릴 때 그것에 최고 신에게 바치는 모든 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뮐러는 교체신교(Kathenotheism)라고 불렀다.
요컨대 『리그 베다』는 다신교, 일신교, 교체신교 그리고 일원론이라는 다양한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2) 제사의 의미
베다의 종교는 곧 제사(yaj~na)의 종교다. 베다적 세계관에선 모든 사건과 행동은 제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제사가 세계의 중심이다. 마치 바퀴가 축을 중심으로 돌듯이 세계는 제사 위에서 움직인다. 『리그 베다』의 원인가(源人歌, Purus.a─su죚kta)는 제사의 본질과 기능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찬가다. 원인가는 천 개의 머리와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발을 가진 원초적 인간인 푸루샤의 자기 희생, 즉 자기 제사에 의해 이 세계와 인간이 출현하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제사는 지고의 힘이고 모든 존재는 이 힘을 통해서 창조되었음을 시사한다. 이 찬가는 또한 인간과 자연과 신들이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음을 노래하였다. 원인(源人)의 자기 희생(self-sacrifice)은 원초적 제사로서 베다 인은 제사에 참여함으로써 모든 존재의 밑바탕에 놓인 단일성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로써 궁극적 존재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세계와의 연결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다.
제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원천으로 돌아감으로써 그 근원적 힘에 의해 삶과 세계를 재창조하고 재생하고자 한다. 제사란 인간과 신과 자연적 존재의 친교(親交)를 즐김이며 그 친교로부터 새로운 존재를 창조함이다. 베다의 선인에 따르면 이 친교와 그를 통한 힘의 획득은 삶을 유지하고 갱신시키는 데 필수 조건이다. 『샤타파타 브라흐마나』는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는 무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 우주는 존재하는 한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제사엔 다음과 같은 세 측면이 있다. 첫째는 존재가 성취한 힘을 경축하는 것이고, 둘째는 생성의 바탕으로 돌아감으로써 존재를 갱신하는 것이고, 셋째는 자기를 바침으로써 새로운 존재를 창조함이다. 제사는 단순히 신들에게 찬사와 공물을 바침으로써 그 대가로 이익과 은혜를 얻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을 재창조하고 유지하려는 행위다.
그런데 제사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근원적인 힘인 르타에 상응해야 한다. 제사를 구성하는 율동적인 노래와 기도, 주의 깊게 통제된 봉헌과 예배 행위에 의해 르타의 중심으로 침투하여 궁극적 힘을 공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만트라와 행위로 제사를 관장하는 바라문(사제)은 제사의 힘을 통해 우주를 통제한다고 여겼다.
3 우파니샤드의 사상
베다의 마지막 부분(anta)을 차지하며, 또 베다의 궁극적 취지라는 의미에서 ‘베단타(Veda죚nta)’라고도 불리는 우파니샤드는 어원적으로 자격을 갖춘 제자가 스승 가까이(upa-ni) 앉음(sad)을 의미하여, 우주와 인간의 궁극적 진리에 대한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상징하는 말이다. B.C. 800년 이후 수세기에 걸쳐 많은 철인(哲人)과 신비가들에 의해 형성된 이 문헌은 종류도 많고, 내용도 일관된 것이 아니지만 이후의 인도 종교와 철학사상을 결정짓는 바탕이 되고 있다. 존재의 기본적 힘을 찬탄하고 존재의 근원에 회귀하여 세계와 삶의 재창조에 참여하는 행위인 제사가 아랸야까에선 내면화되고 상징화되기에 이르렀으며, 우파니샤드에 와선 그 근원적인 존재(=브라흐만, 梵)를 외적인 제사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제사, 즉 작은 나의 포기와, 참 나, 근원적인 자아(아트만)에 대한 명상적이고 신비한 지식을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서 외적인 행위로부터 내적인 지식(직관적, 신비적 지식)으로 모색의 방향이 바뀌었다.
그러한 변화의 요인은 초기의 낙관적인 관점이 바뀌어 생사의 반복적인 순환 즉 윤회와 삶의 피할 수 없는 한계들 즉 고(苦)의 관념이 우파니샤드 시대의 철인들의 마음을 지배하였고, 어떻게 하면 그로부터 벗어나는가 하는 문제가 그들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행위(카르마)란 제사행위와 같은 좋은 행위일지라도 인과의 법칙에 따라 과보를 낳게 마련이고, 설사 내세에 조상들이 사는 하늘(天)에 태어나도 그 업력이 다하면 다시 죽어 지상에 돌아와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윤회의 관념은 우파니샤드에서 확립된 이래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특징짓는 요소가 되었고 그와 더불어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해탈이 인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로 자리잡았다.
우파니샤드의 철인들은 만물이 그로부터 나오고 마침내는 그로 회귀하는 존재의 근원을 ‘브라흐만’(梵)이라고 불렀고 그것은 생사의 윤회에 영향받지 않는 불변의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만약 인간이 그 브라흐만과 하나가 된다면 더 이상 생사의 윤회에 속박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브라흐만과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우파니샤드는 “브라흐만을 아는 자는 곧 브라흐만이 된다.”고 가르친다. 또 이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므로 브라흐만을 알고, 브라흐만이 된 자는 더 이상 욕망할 것이 없는 완전한 자족과 지고의 축복 상태에 든다.
그러면 어떻게 브라흐만을 알 수 있는가? 브라흐만은 어떤 속성도 갖지 않고 또 모든 존재의 바탕이므로 다른 사물이나 대상을 인식하듯이 지각이나 개념적 사고에 의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브라하드아란야카 우파니샤드』에서 철인 야갸왈캬는 “그것을 안다고 하는 자는 그것을 모르는 자이고, 그것을 모른다고 하는 자는 아는 자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브라흐만은 개념화될 수도 기술될 수도 없는 초월적 실재이지만 우파니샤드의 위대한 발견은 그것이 바로 가장 가까이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의 ‘참 나’ 즉 아트만을 통해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브라흐만은 곧 인간 내면의 아트만이므로 아트만을 아는 자는 브라흐만이 되고 이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진리가 우파니샤드의 비밀스런 가르침으로서 흔히 ‘타트 트왐 아시’(Tat-tvam-asi, 그대가 곧 그것이다) 혹은 ‘내가 곧 브라흐만이다’ ‘이 아트만이 브라흐만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리하여 존재의 힘을 축하하고 존재의 근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제사의 의미가 아란야카에서 내면화되었 듯이,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에 대한 모색은 인간 내면의 아트만에 대한 탐구로 내면화되었다. 우파니샤드는 제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이전의 제사의 의미를 재해석하였다. 거짓된 나를 제사지냄으로써(자기포기, 희생) 근원적인 실재인 참 나, 대아(=아트만)로 회귀하고 브라흐만과 하나가 되는 것이 우파니샤드적 제사의 의미다.
그러나 브라흐만과 둘이 아닌 아트만이란 무엇인가?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아트만은 최고의 가치로서, 다른 모든 가치들은 그 자체로서 귀중한 것이 아니라 바로 아트만 때문에 귀중한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것들은 언젠가 모두 소멸하지만 아트만은 시간에 의해 파괴되지 않으며 늙음과 죽음,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고자 해야 하며 그것을 아는 자는 전 세계를 얻는다고 말한다.(『찬도갸)8.7~12)
그러나 아트만은 아는 대상이 아니라 아는 주체이므로 다른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으론 알 수 없다. 우파니샤드는 인드라 신이 101년이나 걸려 프라자파티 신으로부터 아트만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다는 신화로써 아트만의 인식이 길고도 어려운 수련과 탐구를 요구하는 과정임을 예시하고 있다. 우파니샤드는 의식의 네 단계설(四位說)이나5장설(五藏說)에서 인간을 여러 가지 층으로 이루어진 심층적 존재로 분석하고 그것들이 모두 아트만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아트만을 깨닫기 이전의 일상인들은 아뜨만이 아닌 신체나 감관, 마음 혹은 소유물 따위를 아트만으로 동일화하여 그에 집착한다. 그것이 바로 윤회와 고의 원인인 착각이고 무지다. 그릇된 자기 동일화에서 벗어나 아트만을 깨달음으로써 윤회와 고에서 해탈하려는 것이 우파니샤드 철인들의 목표였다.
우파니샤드에 바탕하여 그것을 체계화시키고 발전시킨 것이 ‘베단타’ 철학이며, 그중에서도 샹카라(A.D. 8세기경)의 아드와이타(不二) 베단타는 오늘날까지도 인도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4 베다 사상과 불교
B.C. 1500년경부터 시작된 베다 문화는 불교가 발생할 무렵인B.C. 500년경엔 이미 천년 가까운 전통을 이어왔다. 그러므로 비록 불교가 베다나 바라문, 그리고 제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반문화 운동이기는 하나 베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인과응보 사상이나 윤회의 관념, 그리고 무지와 고(苦), 지(知)와 해탈, 요가와 명상(선정)의 방법 등은 이미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형성되었고, 비록 불교적으로 재해석되었을지라도 불교 특유의 관념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진리, 규범 등을 뜻하는 다르마(dharma, 法)도 『리그 베다』에서 만물에 질서와 조화를 주는 통제력인 르타(r.ta, 天則)에서 발전된, 힌두와 불교가 공유하는 관념이다. 또 『리그 베다』의 신(데바)들은 범천(梵天, 브라흐마), 제석천(帝釋天, 인드라) 등으로 불교 신화 속에 흡수되었다.
베다와 불교와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가 있다. 하나는 라다크리슈난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처럼 불교가 우파니샤드적 전통을 이은, 우파니샤드와 거의 유사한 사상이라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베다적 전통과 불교는 유아적(有我的) 전통과 무아적(無我的) 전통으로 전혀 대립되는 사상이라고 하는 견해다.
앞에서 든 몇 가지 예가 시사하듯이 불교는 베다적 전통으로부터 적지 않은 덕을 입은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불교를 우파니샤드에서 나온 우파니샤드의 한 갈래로 볼 수는 없다.
우선 드러나는 차이는 우파니샤드는 궁극적 실재를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이라고 적극적으로 내걸고 출발하는 데 반하여 불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스스로 체험해야 할 것(自內證法)은 말을 아끼고 가능하면 침묵을 지키려고 한다는 점이다. 우주론적,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선 침묵을 지키고(無記) 경험적이고 현상적인 영역만을 일체법(一切法)이라고 불러 그것을5온, 12처, 18계, 12연기 등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도 비록 ‘아트만’이라고 말하면서도 ‘이것도 아니다. 저것도 아니다(neti neti)’라는 유명한 문구가 가리키듯이 아트만이나 브라흐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를 우파니샤드적 전통의 일부로 보는 것도 극단적 견해이지만, 양자를 유아론(有我論) 대 무아론(無我論)으로 대립관계에서 해석하는 것도 극단적 견해라고 생각한다. 우선 불교에서 ‘무아’(無我, ana tman)라고 할 때 부정되는 ‘아’(我, 아트만)의 의미가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아트만’과 같은 것이라는 전제부터 검토해야 한다. 만약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무기적(無記的) 입장에 모순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한 ‘무아’란 우파니샤드의 아트만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체법인 현상적, 경험적 차원에서의 인간을 이루는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 요소 즉5온에 독립적이고 영구불변한 실재성이 없음을 가르침으로써 아집과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실천적 의도를 가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도에서의 무아설은 불교만의 특유한 것이 아니라 우파니샤드의4위설이나5장설도 유사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교설이다. 예를 들어5장설은 신체나 생기(生氣), 마음, 의식 등이 아트만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고 있는 덮개(藏)라고 가르침으로써 나 아닌 것과의 그릇된 동일화와 그로 인한 집착을 소멸하고자 의도한다.
그러므로 우파니샤드와 불교를 유아론 대 무아론으로 일반화하기 이전에 두 사상체계에 대한 보다 면밀하고 조심스러운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불교의 특징은 우파니샤드의 유아론을 부정한 무아론이라기보다 무아론에 바탕하여 현상계(一切法)를 ‘연기’(緣起)라는 개념으로써 설명한 것이라고 보인다.
무아 → 연기 → 공 → 유식(唯識)으로 이어지는 불교적 개념들은 인도와 세계사상계에 대한 불교의 위대한 기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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