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因果)가 있을뿐 운명은 없다 /성철스님
아침에 올라가는 가야산은 안개가 끼어서인지 골이 더 깊어 보였다. 간혹 다람쥐가 빠끔히 내다보는 산길에는 진달래 꽃망울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10시, 다시 백련암. 염화실의 미닫이에 스님의 그림자가 비치는가 싶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밝은 얼굴빛 때문일까. 깊은 소(沼)를 연상케 하는 스님의 눈에서는 청솔바람이 이는 듯했다.
■ 스님이 지금 느끼시고 계시는 것은 무엇인지요?
"따스하니까 다니기에 좋네."
■ 봄이면 젊은이들한테 봄바람이 난다고 합니다만…….
"꽃 필 때 춤도 춰 보는 게 좋지."
■ 도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그리고 도를 깨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도는 우주의 근본이며 만물의 자체이니 시공을 초월하고 시공을 포함한 절대체 입니다. 따라서 만물 하나하나가 모두 도이며 현실이 곧 절대입니다. 이 도는 인간의 마음속에 완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로 보면 도를 아는 바, 이것을 깨쳤다고 하지요.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망상이 마음을 덮고 있기 때문이니, 구름이 해를 가리면 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해를 보려면 구름이 걷혀야 함과 같이 마음을 보려면 망상을 없애야 해요. 망상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으면 마음을 보지 못합니다."
■ 운명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운명이라는 것을 바꿀 수 있는지요?
있다면 그 방법을 일러주십시오.
"인과(因果)가 있을 뿐이지 결정적인 운명은 없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심은데 팥 나는 우주의 근본법칙 그대로이지요. 모든 결과는 노력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결과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힘써 노력하면 좋은 결과는 자연히 따라 옵니다.
여기에 큰 자유의 원리가 깔려 있어요. 어떤 분은 결과가 원인에 반비례하는 일도 있다고 할지 모르나 이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지 운명은 아닙니다. 자력(自力)을 다했을 때 타력(他力)이 나타나는 거예요. 선은 행복을 낳고 악은 불행을 부르는 원리에는 변동이 없습니다. 즉 남을 돕는 선행만 하면 바라지 않아도 선과(善果)는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유의할 것은 남을 도울 때는 다만 남을 돕는다는 생각만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남을 이만큼 도우면 나에게 그만한 대가가 올 것이라는 상업심리로 하면 이는 장사이지 남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남을 돕는 사람은 남을 돕고 돕고 하여 이것을 끝없이 반복하여 나아갑니다. 여기에서 참다운 운명을 알게 되어 영원한 인격자가 되는 것이지요."
■ 행복의 길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여 주십시오.
"행복은 인격에 있고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물질이 풍부하더라도 인격이 부족
하면 불행하고, 물질이 궁핍하더라도 인격이 훌륭하면 행복합니다. 보살도(菩薩道)는 인간생활의 근본이며 행복의 극치이니, 자기를 아주 버리고 오직 남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고생이 되더라도 남의 안락에 대해서만 노력해 보세요. 남을 위한 나의 노력과 고생이 커짐에 따라 남이 더욱 안락해지면 나의 행복은 더 커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나를 중심으로 하는 한 욕심의 노예가 되므로 모든 죄악과 불행이 옵니다. 나를 잊어버리고 남을 이익케 하는 생활을 계속하면 자연히 인격이 순화되어 영원하고 무한한 자기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탁월한 행동과 언설은 생전과 사후를 통하여 항상 남을 이익케 하는 것이니, 이것이 영원하고 진정한 행복입니다. 또한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신명까지 바친 사람은 아무리 비참한 최후를 가졌어도 참으로 행복하다고 아니 할 수 없지요."
■ 그것은 희생이 아닌지요?
"행복입니다."
■ 일반적으로 잘 살고 높이 되는 것을 행복이라 합니다.
"그거야 어린애들 놀이지."
■ '샘터' 독자들에게 한 말씀만 더 해주십시오.
"나는 본래 푸른 산이나 바라보고 흰구름이나 쳐다보며 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산(山)사람입니다. '샘터'의 요청에 못 이겨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군요.
독자들에게 부디 나의 말에 속지 말라 하십시오." 종정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특별히 '샘터' 가족들에게 법어(法語)를 주셨다.
허허 첩첩 산중 깊은골을 홀로 거니니 인기척에 놀란 토끼 황급히 달아나네.
잣새와 바위종다리 울음소리가 그득한 뜰에서는 마악 목련이 터지고 있었다.
낮 예불이 시작되었다.
1983년 5월호 월간 {샘터} 정채봉 기획부장과의 대담
#성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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