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교리 / 2장 / 1절
1절 불교의 종교적 이해와 실천
1. 종교와 불교
2. 불교에서 종교의 의미
1절 불교의 종교적 이해와 실천
1. 종교와 불교
우리 주변에서는 가끔 ‘불교는 종교가 아니고 철학’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언급은 인간에 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불교의 철학적 태도 때문이기도 하지만 절대자로서의 신(神)을 상정(想定)하지 않는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기독교, 가톨릭과 같은 서구종교 중심주의에 은연중 물든, 불교에 대한 장님 코끼리 만지기(群盲撫象)식의 피상적 관찰일 뿐 불교에 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1870년 뮐러가 영국의 왕립학사원에서 개최한 강연에서 종교학(Science of Religion)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래 철학, 문화인류학 등의 영역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한 오늘날의 종교학에서도 ‘신과 사람의 관계’라는 오래 된 틀 안에서만 종교를 규정하려고 했던 과거의 종교학은 이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오직 기독교적 전통 안에서 기독교를 연구해온 종교학자들은 19세기 이후 유신론도 무신론도 아닌 “번뇌를 정화하는 수행, 그것이 불교[淸除煩惱是佛敎]”라는 입장을 표명하는 불교와 같은 위대한 동양의 종교적 전통과 대화를 시작하면서 불교가 그들의 종교관의 틀 안에 적용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서 종교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시작했다. 그 결과 종교에 관한 다양한 정의들이 내려졌다.
종교란 무한의 것을 인지하는 마음의 능력이다(막스 뮐러).
종교란 인간의 원초적이며 무의식적이며 생득적인 무한감각이다(C. P틸레).
종교란 신념과 행사(行使)의 연대적 체계이다(E. 뒤르껭).
종교란 성스러운 것(das Numin쉝e)에 대한 전율이다(루돌프 오토).
종교의 의미에 관한 이와 같은 규정들은 불교의 종교적 진실에 관한 직접적인 정의는 아니지만 불교의 종교적 의미를 해명하기 위한 하나의 작업가설로서 유용한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신 없는 종교’라고도 한다. 인간을 창조한 절대자로서 신이 없는 종교가 있을 수 있을까? 불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불교는 신의 존재를 상정하거나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을 철학적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無神論)이라고 하지만 이와 같은 규정은 어디까지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有神論)과 대비하는 말일 뿐 ‘불교는 무신론’이라는 언급 자체가 상당히 애매한 규정이다. 물론 불교도 신앙을 중시하며 부처님과 교법과 승가에 귀의하는 삼귀의(三歸依)를 기초적인 신앙의례로 삼고 있을 만큼 신앙을 중시한다. 그러나 불교는 피조물의 입장에 창조주이며 절대자인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불교에 있어 신앙은 “신(信)은 마음의 징정(澄淨)이며 사제(四諦)와 삼보(三寶)와 업과(業果)에 대한 확인이다”(≪俱舍論≫)라고도 지적되며 지혜와 자비의 실천에 있어서 불가결한 제일의 덕목이다.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는 신(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신(信)이란 무엇인가? 진실[實]·덕성[德]·평화[深忍]·희망[欲]이니 마음의 청정을 본성으로 삼아 불신(不信)을 대처하는 것이며 선(善)의 실천을 업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신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신(信)에는 진실이 있으니 제법의 진리 중에 깊은 믿음의 진리를 내는 까닭이다.
둘째, 신(信)에는 공덕이 있으니 삼보의 청정한 덕 가운데에서 깊은 믿음의 즐거움을 내는 까닭이다.
셋째, 신(信)에는 능력이 있으니 일체세간, 출세간의 선에 깊은 믿음을 내는 능력으로서 능히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희망을 일으키는 까닭에 그 마음의 불신을 이기게 된다. 출세간의 선을 닦고 증득하는 것을 사랑하는 까닭에 신앙을 거룩한 진리라고 하며 믿음의 뿌리라고 한다.
[云何爲信 於 實·德·能深忍·樂·欲 心淨爲性 對治不信 樂善爲業 然信差別略有三種 一信實有 謂於諸法實理中深信忍故 二信有德 謂於一切世間出世善 深信有力能得能成 起希望故 由斯對治不信彼心 愛樂證修世出世善 忍謂勝解 此信因 樂欲爲欲 卽是信果 確陳此信 自相是何 豈不適言 心淨爲性]
또한 여러 경전에 불자들이 부처님을 ‘신앙(信仰)’했음을 말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인민 가운데 남녀 모두가 신앙치 않음이 없다[人民男女莫不信仰]”
≪月光童子經≫
“그 밖의 다른 대중들도 신앙을 일으켰다[於餘衆生於信仰]”
≪大寶積經≫ 권88 <摩訶迦葉會>
“여래의 처소에서 삼가 공경하고 신앙하는 마음을 일으켰다[於如來所倍生敬重信仰之心]”
≪大寶積經≫ 권35 <菩薩藏會>
“일체의 선인의 수수한 행은 인천 등이 모두 함께 신앙하는 바이다[一切仙人殊勝行 人天等類同信仰]”
≪華嚴經≫권 14 <賢首品>
불교의 신앙은 인간을 만든 절대자, 그리고 인간을 타율적으로 심판하는 신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불교도의 신앙은 초기경전 ≪숫타니파타≫가 설하는 바와 같이 지혜와 자비의 길을 열어 보이신 성스러운 부처님께 귀의하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귀의하며, 그 가르침을 수행하는 성스러운 승가에 귀의하는 기본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한, 깨달음의 길에 대한 확신이다. ≪숫타니파타≫의 183, 184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사람은 어떻게 거센 흐름을 건넙니까? 어떻게 해서 바다를 건넙니까?
어떻게 해서 고통을 초월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서 완전한 청정의 경지[解脫]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신앙으로서 거센 흐름을 건너고 정진으로서 바다를 건넌다.
근면으로서 고통을 초월하고, 지혜로서 완전한 청정의 경지에 도달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적어도 불교도에서 종교의 의미는 타율적인 심판을 내리는 절대자에 대한 피조물로서의 예속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인간생활의 궁극적인 문제에 주목하고 삶의 여러 갈등과 문제들을 해결하는 고차적인 신앙과 수행의 체계이다. 또한 불교도들에게 있어 신앙의 의미는 단순한 ‘믿음’만이 아니라 지혜의 증장에 필요한 덕목이며 마음의 청정을 증득하는 기본전제로서 기능이다. 이 점을 신앙의 교법을 집중적으로 설명하는 ≪화엄경≫ <현수보살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깊은 믿음은 가히 무너트릴 수 없으니 일체제불을 공경, 공양하며
제불과 정법(正法), 성스러운 승가를 믿고 공경하는 까닭에 보리심을 발한다.
제불과 정법을 깊이 믿고 또한 보살이 행한 바 도를 믿어서
바른 믿음으로서 부처님의 보리를 향하게 하여 보살이 초발심하는 원인이
된다.
신(信)은 불도의 근본이며 모든 공덕의 어머니이다.
일체의 선법(善法)을 증장하고 일체의 의혹을 극복하여
위없는 진리를 개발하고 시현한다.
청정한 믿음은 묵은 때를 벗게 하고 마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여
교만을 제멸하는 공경의 근본이다.
[深心淨信不可壞 恭敬供養一切佛
尊重正法及聖僧 信敬三寶故發心
深信諸佛及正法 亦信菩薩所行道
正心信向佛菩提 菩薩因是初發心
信爲道元功德母 增長一切諸善法
除滅一切諸疑惑 示現開發無上道
淨信離垢心堅固 滅除驕慢恭敬本]
2. 불교에서 종교의 의미
불교에서 종교란 무엇일까?
우선 용어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이미 앞에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종교(宗敎)라는 말이 현재의 뜻으로 사용된 것은 서양의 religion이라는 말을 일본 학자들이 번역하면서부터 임을 이야기했다. 따라서 불교, 기독교, 카톨릭, 회교 등과 같은 세계종교를 모두 망라하는 상위개념으로서 종교라는 용어가 한국, 중국, 일본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백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최근 기독교의 공세적인 선교에 익숙한 대중들은 종교라고 하면 하느님을 믿는 것, 또는 어떤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것이라는 서구적 종교관에 의한 선입감이 확산되면서 불교 등의 세계종교를 모두 망라하는 상위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종교는 불교의 교리, 즉 궁극적인 자내증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종(宗)과 그 깨달음을 설하는 언어의 체계로서의 교(敎)를 의미하는 하위개념이었다. 경전과 선어록을 포함한 불교문헌에서는 이 종교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된다. 종교라는 용어의 불교적 기원을 보여주는 경전으로 ≪능가경(楞伽經)≫을 보도록 하자.
부처님께서 대혜(大慧)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소승과 대승의 보살들에게는 두 가지 근본적인 가르침(二宗法相)이 있다. 무엇이 그 두 가지 근본적인 가르침인가? 그것은 첫째 종취법상(宗趣法相)과 언설법상(言說法相)이다. 종취법상이란 스스로 증득하는 거룩한 특성을 가지며 문자언어의 분별을 넘어선 무루(無漏)의 법계에 들어가 일체의 바르지 못한 사상들과 외도를 극복하여 스스로 깨달은 지혜가 빛나는 것이다. 언설법상이란 구분교(九分敎)의 가르침에 의한 여러 가지 교법이며 일체의 차별과 평등, 유와 무의 대립적인 견해를 벗어나 훌륭한 방편으로 중생심을 올바른 견해로 이끄는 것이니 이것이 언설법상이라고 한다.
이처럼 ≪능가경≫에서는 스스로 체득하는 불법의 근본적인 영역을 종취법상, 그 도리를 설하고 실천하는 것을 언설법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원래 불교의 근본도리를 의미하는 종(宗)이라는 용어는 범어를 한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예를 들어 ≪능가경≫의 싯다타(Siddha-ta)라는 용어를 한문으로 옮기면서 종이라는 글자를 선택했다. 이 sid-bha-ta란 “성취된 것, 완성된 것”을 의미하는 sibbha와 “종극, 극치”를 의미라는 anta라는 용어의 합성어이다. 즉 불교의 수행에 의해 성취된 최종적인 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이란 불교의 근본진리를 깨닫고 닦음으로서 성취된 지고한 경지를 나타냈다. 이 경지는 그것 자체로서는 언설문자를 넘어선 것이지만 언어로 표현되지 않으면 전달될 수 없으므로 교(敎)가 성립한다. 즉 상대방을 이끌어 종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교가 성립하여 종교라는 말이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선종에서도 이 종교라는 용어가 선의 깨달음과 그 실현을 의미하는 용어로 즐겨 쓰인다.
드디어 종지가 멸하여 끊어질까 염려한 나머지 지(知)의 1자(一字)가 바로 중묘(衆妙)의 문인 것을 말하여 배우는 자의 깨달음이 앝고 깊음에 맡겨서 종교가 끊어지지 않도록 힘쓰기를 바란다
[恐宗旨絶滅 遂言知之一字衆妙之門 任學者悟之深淺 且務 宗敎不斷 : 宗密, 『禪源諸詮集都序』].
대저 종교를 일으켜 세워야만 모름지기 영명하고 영묘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大凡扶竪宗敎 須是英靈底漢 : 『碧巖錄』 제5 垂示].
불교에서는 종교를 “절대자 신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Religion이 아니라 불교의 근본도리를 깨달은 자각성지(自覺聖智), 즉 종(宗)과 그 언어적 표현, 즉 교(敎)를 병칭하여 불교의 해석체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술어로서 삼고 있다. 불교에 있어 종교의 의미를 살펴본 이상의 설명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① 우리는 보통 종교를 불교의 상위개념으로 알고 ‘불교는 종교인가, 철학인가?’라고 묻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불교는 자각성지, 반야와 같은 근본도리를 종(宗 : 宗趣法相)으로, 그 언어적 표현을 교(敎 : 言說法相)로 파악하고 종교와 철학을 분리하지 않는 독자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해석체계를 수립하고 있다.
② 불교, 기독교, 카톨릭과 같은 세계종교를 포괄하는 하나의 관용어로서 종교라는 용어는 종교다원주의에 입각한 상대적 표현일 뿐 특정종교에 관한 종교학적 정의(定義)가 여타의 모든 종교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③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종교적 이해와 그 실천에 혼란을 일으키게 한 주요배경은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종교를 파악하는 일부 서구종교 중심주의에서 비롯된 피상적인 오해일 뿐이다. 불교는 분명히 가르침의 창시자 부처님과 교리, 교단(僧伽), 신자가 있으며 삶의 의례, 시설, 활동, 사회적 기능을 활발히 펴나가고 있는 세계종교이다. 더욱이 우리는 불교가 2천여 년에 걸쳐서 수많은 종교적 천재들이 모두 참여하여 이룩해낸 동양의 종교적, 문화적 성과의 집적이며 오늘날 가장 강력한 전통과 수행체계, 설득력 있는 교리를 지니고 있는 대중적인 종교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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