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의 이해▶/-------한국불교

근대 이후의 불교 4. 해방 이후의 불교

香積 2009. 8. 1. 18:57

4. 해방 이후의 불교

해방과 교단개혁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불교계는 식민지 불교체제의 해체와 교단 개혁을 위한 즉각적인 활동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뒤를 이은 미국 군정은 기독교를 지원하고 불교를 차별하는 편향적 태도를 보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귀속재산 처리법의 운영에서 불교 측의 재산권한을 배제한 것이었다. 더욱이 행정편의적 발상으로 식민지 불교체제의 상징인 사찰령을 그대로 유지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교단의 개혁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8ㆍ15 직후 일제시대 조계종을 재건한 집행부가 새 시대를 열고자 스스로 물러나고 ‘재경 유지 승려’가 주축이 되어 교단을 인수하게 되었다. 이들은 교단의 인수, 인계를 추진하면서 과도적 임시집행부인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1945년 9월에 서울 태고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식민지불교의 상징인 사찰령을 전면 부정하고 새로운 교단기구 구성과 본말사제를 대체할 도별 교무원제를 결의하였다. 또한 교정에 박한영(朴漢永), 총무원장에 김법린을 추대하고 종지, 종통, 교단기구 및 교단의 실무적 내용을 종합한 ‘조선불교 교헌(朝鮮佛敎 敎憲)’을 제정 반포하였다. 이 교헌에서 ‘조계종’이라는 종래의 종명이 ‘조선불교’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각종 혁신단체들이 등장하여 식민지불교의 청산과 새로운 불교 개혁안을 주장하였다. 불교청년당, 혁명불교동맹, 조선불교혁신회, 불교여성총동맹 등이 그들인데 각 단체만의 특징도 있었지만 이들의 주장은 대체로 31본산 제도의 폐지, 교구제ㆍ교도제(敎徒制)ㆍ불교재산 통합의 실시, 사찰의 토지 소유 반대, 교단 및 민족 반역자 청산 등이었고 교단개혁뿐만 아니라 사회개혁까지 그 주장이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교단 집행부와 혁신단체 간에는 점차 교단개혁의 추진 방향과 속도에 대한 대립이 발생하였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양측에서 교단개혁안의 핵심으로 내세운 교도제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다. 대처승이 대다수인 교단 집행부에서 주장한 교도제는 신도의 조직화로 이해한 반면에, 비구승 중심의 교단을 지향한 혁신단체는 교도제를 대처승의 교도화로 추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사찰의 토지 소유에 대한 문제도 양측의 주장이 대립한 부분이었다. 결국 혁신단체 측은 당시 교단 집행부로는 식민지 불교체제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집행부는 혁신단체의 노선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의구심을 표명하였다.

이와 같은 대립은 혁신단체들이 연합하여 1946년 12월에 선학원을 중심으로 불교혁신총연맹(佛敎革新總聯盟)을 발족하고, 1947년 5월에 조선불교총본원(朝鮮佛敎總本院)이라는 별도의 종단기구를 구성함으로써 극단으로 치달았다. 주목되는 것은 선학원 측의 비구승들이 이러한 혁신단체들의 움직임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교단운영 참여와 선원의 확장, 자치를 위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등에서 종권의 소외를 절감한 비구승들이 혁신운동의 대열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교단을 내분을 겪고 상호간의 이념적 공방도 끊이지 않은 가운데 총본원은 교단의 탄압 속에서 토지개혁과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입장 차이로 내분을 맞았다. 교단 집행부도 교단운영의 노선을 둘러싸고 폭력 사태가 벌어지는 등 안정을 이루지 못한 채 6ㆍ25 전쟁을 맞았다.

교단 운영상의 내분과 이념갈등으로 중앙의 불교계가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에 비구승들은 수행가풍의 진작을 위한 움직임을 이어 나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6년 해인사 가야총림(伽倻叢林)의 창설이다. 가야총림은 교단 차원의 모범총림 창설안으로 마련된 것으로 수행승들이 집단적으로 모여서 수행할 수 있는 선원, 강원, 율원 등을 갖춘 종합 수도도량을 만든 것이다.

성철, 청담, 향곡, 자운, 월산, 혜암, 성수, 법전 등 젊은 수좌들이 모여 공동수행을 행한 봉암사 결사도 이즈음인 1947년경에 시작되었다. 이 봉암사 결사는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취지로 청정한 수행가풍을 되살리고 부처님께서 본래 뜻하신 계율, 교법의 준수 등 불교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수행결사였다.

한편, 1947년에 만암(蔓庵)이 백양사를 중심으로 결성한 고불총림(古佛叢林) 역시 승풍 정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고불총림의 청규 중에는 승려를 정법중(正法衆)과 호법중(護法衆)으로 구분하고 그에 맞는 직분을 설정하여 교단 내의 대처승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승단 정화운동의 전개
일제 식민지 정책이 한국불교계에 남긴 가장 큰 폐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비구승 중심의 승단 전통을 파괴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급속히 진전된 승려의 대처와 세속화 경향은 한국불교의 전통과 비구승단의 존립을 크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본래 뜻하신 청정 비구ㆍ비구니 승가의 계율을 위배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비구승들이 수행전통을 지키고 선풍을 진작시키려는 노력은 연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일제시대의 선학원 운동이 그러했고, 해방 후 혁신 계열의 일부 주장과 교단 일각에서 일어난 승풍 결사운동 역시 ‘부처님 법대로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살리자’라는 움직임이었다. 비구승은 자신들이 승단의 정통임을 자처하면서도 대처승들에 밀려 오랜 기간 종권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1952, 3년경 일부 수행사찰을 할애해 달라는 비구승들의 요구가 있었지만 대처승들이 주도한 교단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1954년 5월 불교정화를 촉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는 이른바 ‘정화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유시의 내용은 교단과 사찰은 비구승이 담당하고 대처승은 사찰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대처승과 비구승 간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비구승측은 대처승을 몰아내고 비구승 중심의 교단을 건설한다는 명분의 활동을 ‘정화운동’으로 규정하고 결의를 다졌다. 그 활동의 중심은 일제시대 이래 비구승들이 결집하고 있던 선학원이었다.

1954년 9월 비구승들은 선학원에서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하여 종헌을 통과시키고 임시종회를 구성하였다. 이 때 대처승단과의 차별을 의식해 종조를 보조국사 지눌로 정했는데, 이에 대해 비구승인 만암은 종조(宗祖)를 바꾼 ‘환부역조(換父易祖)’라 비난하고 비구승들의 정화의 취지에는 찬동하지만 그 이행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로부터 비구와 대처 양측의 갈등은 폭력을 행사하여 태고사5)를 뺏고 빼앗기는 악순환을 거듭하는 극한 대립을 보였다.

마침내 문교부가 분쟁개입을 선언하고 1955년 불교정화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양측을 중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구승 측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나아가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정부의 제한적 승인 속에 열린 이 승려대회에서는 기존의 종회의원과 중앙간부를 해임하고 새로운 종회와 교단 집행부를 선출했으며, 전국 사찰의 주지를 새롭게 임명하였다. 이러한 승려대회의 결과를 실행하기 위해 비구승들은 전국 사찰에 대한 접수에 나서게 되었다. 이로써 정화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사찰관리의 인수, 인계를 둘러싼 분쟁이 이어지게 되고 이 과정에서 대처승 측은 법정으로 분쟁을 끌고 갔다.

그런데 4.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위기감에 휩싸인 비구승측은 자신들이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는 법원 판결에 문제를 제기하고 1960년 11월 비구승 대법원 난입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에서는 법원에 난입한 승려 중 여섯 명의 비구승이 법원에서 할복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곧이어 일어난 1961년 5.6 군부 쿠데타는 불교정화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다. 쿠데타 세력이 조직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사회악 일소 차원에서 불교계 분규처리를 시도하여 분규해결을 위한 불교재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 비구와 대처 양측이 합의한 불교재건비상종회가 열리고 새로운 종헌이 통과되기에 이르러, 1962년 4월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이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오랜 분쟁 끝에 대처ㆍ비구 측은 상호 합의하여 통합종단을 출범시켰고, 정화운동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비구승 중심의 종단운영은 통합종단에 들어온 대처 측의 반발을 샀고, 일부 대처 측은 결국 1970년에 독자적인 태고종을 창종하기에 이르렀다.

조계종의 내분과 발전
통합종단 출범 이후 곧바로 안정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승단정화와 한국불교의 전통 복원이라는 대의명분에서 교단을 인수하여 운영하게 된 비구승들은 행정경험의 부재와 운영관리 역량의 미비로 1990년대 말까지 크고 작은 내분이 적지 않았다.

특히 1980년 10ㆍ27 법난은 한국불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치욕적 사건이었다. 당시 계엄군은 불교계를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10월 27일 새벽 전국 사찰에 들이닥쳐 종정과 총무원장, 본사 주지 등 종단 지도부 다수를 연행하여 조사한 뒤 그 중 20명 가까이 구속하였다. 이 수사과정에서 일부 혹독한 고문이 행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계엄군은 불교비리를 수사한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종권을 둘러싼 암투, 폭력 행위, 사찰 재산의 유용 등에 대하여 수사하여 그 결과를 조치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군사독재가 지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법난에 대하여 진상규명을 한 바 혹독한 고문과 강압적 수사로 조작된 것이 많았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불교계에 대하여 정치권력이 왜 이처럼 치욕적인 탄압을 가한 것일까? 물론 불교계 안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70년대 종단은 종정과 총무원장 사이의 권한 갈등으로 인한 분규로 극한적인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종교계 내부의 문제로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정교분리가 헌법에 보장된 사회에서 합당한 일일 것이다.

당시 군사정부가 불교계에 탄압을 가한 것은 자신들이 정변의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사회정화’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내분이 있어 온 불교계를 표적으로 삼은 결과였다. 즉 군사정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종교계 중 취약했던 불교계를 희생시킨 것이다.

한편, 10.7 법난으로 불교도들은 자주적 각성이 일어나게 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느닷없이 전국 사찰에 들이닥쳐 총부리로 위협받는 수모를 당해야 했던 승려들과 이러한 사실을 지켜본 재가 불자들은 군사정권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갔고, 불교도들이 단결하여 자주적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에서도 통합종단은 불교 발전을 위한 3대 지표, 즉 역경ㆍ도제 양성ㆍ포교라는 종책과제를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통합종단은 적지 않은 혼란이 거듭되었지만, 이 3대 지표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나아가 1964년에 종립 동국대와 협력하여 동국역경원을 설립하여 고려대장경의 한글화 불사에 착수하였다. 이 역경 불사는 2002년에 완수하게 되었다.

도제 양성은 승려교육을 말하는 것으로 정화 무렵에는 동국대와 주요 사찰의 강원 교육이 전부였으나 지금은 종립 동국대, 중앙승가대 이외에 전국 주요 본사와 사찰에 승가대학, 학림, 율원, 승가대학원, 기초선원 등이 설립되어 약 2천여 명의 승려를 교육하고 있다. 특히 1994년 개혁 불사를 통해 승가교육을 관장하는 교육원을 총무원과 대등한 별원으로 승격시켜 이 불사를 전담하게 하였다. 또한 당시 출가자는 4년 동안의 승려 기본교육 의무화를 제도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포교 방면에서도 중앙신도회(전국신도회)를 비롯한 많은 신도단체와 군법사, 교법사, 경승단, 대한불교청년회, 대학생불교연합회, 어린이지도자연합회 등 다양한 포교기관, 단체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특히 1994년 개혁 불사를 거치며 포교원도 별원으로 승격되어 신도교육과 포교사업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이후, 월간 『법회와 설법』의 발간, 파라미타청소년협회ㆍ상담개발원ㆍ여성개발원ㆍ포교사단 창립 등의 성과가 있었다. 특히 포교원은 종단 차원의 신도교육 체계를 정비하여 신도교육 기관의 확충을 꾀하고 신도 기본교육의 의무화와 신도 종단등록사업을 추진하여 사부대중 공동체의 기반을 다져 나가고 있다. 그 외 많은 신도교육 교재와 포교자료를 개발하여 보급해 나가고 있다. 아울러 국제포교 방면에도 몇몇 원력승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큰 성과를 이루었다. 이 방면에 가장 큰 공로자는 숭산이다. 그는 1966년 일본 홍법원을 개원한 이래 미국,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 선을 가르쳐 50여 명의 외국인 출가 승려와 50,000여 명의 외국인 신도들을 지도하고 있다. 숭산은 달라이라마, 틱낫한과 함께 세계 3대 고승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세계적인 활약을 하였다. 더 나아가 종단의 본래 면목인 수행방면에서도 괄목할 변화가 있었다. 1969년 안거 결제선원은 39개이고 동참 대중은 600여 명으로 추산되었으나, 2000년에 이르면 90여 개 선원에 2,000여 명을 넘는 대중이 동참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도심과 사찰에 시민선원이 있어 정진의 열기가 점점 높아가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불교계 종단의 현황
20세기 후반 한국불교계가 직면한 변화 중 하나는 다종단(多宗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물론 해방 전후부터 천태종 등의 법화계열과 진각종 등의 밀교계열이 창종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공식화된 것은 1962년 제정된 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해서 18개 종단이 불교단체로 등록하면서부터였다. 이후 1987년 불교재산관리법이 폐지되고, 전통사찰보존법으로 대체되면서 군소종단의 분종과 창종은 줄지어 일어나 현재는 한국불교의 전통 대표 종단인 조계종 이외에도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총지종 등 30여 개의 종단이 설립되어 사단법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다(조계종 총무원장은 종단협의회 당연직 의장을 맡고 있다). 종단이 다양화되는 상황에서 불교계의 통일성과 종단의 고유성을 조화시키는 일은 앞으로 불교계의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교육면에서 조계종립 동국대학교와 중앙승가대학교 이외에 1990년대 이후 진각종에서 위덕대학교, 천태종에서 금강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밖에도 다수의 초려芟고등학교가 신설되어 불교계 종립학교로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포교활동에 언론매체가 끼치는 역할도 크게 증대되었다. 1960년에 조계종의 기관지로 「대한불교」, 즉 지금의 「불교신문」이 창간된 이후로 특히 8, 90년대에는 다수의 불교계 신문과 잡지 등이 창간되었다. 또한 각 종단별로도 기관지를 창립하여 정기적으로 발간하고 있다. 1990년대에는 세계 최초로 라디오 불교방송국(BBS)과 케이블 텔레비전 불교TV가 개국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지금은 정보화시대의 포교를 위해 ‘불교 종합 정보망 달마넷’을 개설하여 운영해 나가고 있다.

4) 결(結) : 조세 징수를 위해서 논밭의 면적을 재던 단위.
5) 비구승 측에서 그 명칭을 조계사로 바꾸었다.

 

출처: 대한불교 조계종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