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삶을 직시하여 그 해답을 제시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일까? 그것을 궁굼해하며 해답을 찾아 헤매다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있다. 한평생을 살면서 묵숨 걸고 그 해답을 찾는 것은 진정 가치 있는
일이다.우리의 삶이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말은 쉽지만 태어나는 일만 생각해 봐도 얼마나 고통
스럽고 힘든 일인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받은 작은 상처 하나에도 사느니, 못 사느니, 힘겨워한다.
그리고 큰 병에 시달리거나 평생을 서로 의지하던 사람의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 고통과 아픔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렇듯 돌아보면 삶의 많은 시간이
즐거움보다는 괴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환희의 시간보다 슬픔과 후회의
시간이 더 길고 많다. 그래서 삶을 고해(苦海)고통의 바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왜 사는지, 왜 이 길을 가야 하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끝도 모를 삶을
그저 안개 낀 다리를 건너는 사람처럼 어림짐작으로 살고 있다. 이렇듯 모르면서 그저
어둠 속을 헤매이듯 살아온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닐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인생을 모르면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모르고 사는 삶을 알고 살아가는 삶으로 바꾸어주는 가르침이 바로 불교이다.
모르고 짓는 죄가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런 가책없이 그 행위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고,
그것이 나와 남에게 아픔을 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우리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해답을 주고있다. 이에 대한 부처님 말씀을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뒤에서 성난 코끼리가 달려왔다.
그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몸을 피할 작은
우물이 있었다. 우물에는 마침 칡넝쿨이 있어서 급한 나머지 그것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니 우물 바닥에는 무서운 독사가 혀를 널름 거리고
있었다. 두려움에 위를 쳐다보니 코끼리가 아직도 성난 표정으로 우물 밖을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어디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주위를 살펴보니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우물중간 에서는 작은 뱀들도 왔다 갔다 하면서 그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면서 칡넝쿨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벌 다섯 마리가
날아와 칡넝쿨에 집을 지었는데, 그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그 꿀을 받아먹으면서 달콤한 꿀맛에 취해 자신의 위금한 상황을 잊은채, 꿀이 왜 더
많이 떨어지지 않나하는 생각에 빠졌다.
이 이야기는 불설비유경(佛說비喩經)의 '안수정등도(岸樹井藤圖)'에 나오는 인생에 대한
비유다. 여기서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칡넝쿨은 생명 줄 검은 쥐와
흰 쥐는 밥과 낮을 의미한다.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이며,
벌 다섯 마리는 인간의 오욕락(誤欲樂)을 말한다. 오욕이란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을 말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잊은 채 탐욕의 꿀맛에 취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인생이다.
어떤 사람은 욕망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으로
얻는 것보다는 욕망 때문에 잃는 것이 더 많다.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는 마음은 지혜를
흐리게 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없애고 참된 지혜를 발현토록 해야 한다.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날 때 우리는 코끼리와 독사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깨닫는 순간 코끼리도, 우물도, 두 마리의 쥐도, 독사와 뱀도 말끔이 사라지고 완전한
자유와 진정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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