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의 이해▶/-------한국불교

1. 삼국시대의 불교 - 불교의 수용과 갈등

香積 2009. 8. 1. 18:43

불교의 수용과 갈등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별다른 갈등이 없었던 반면에, 신라에서는 이차돈의 순교사건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불교 수용을 추진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이른 시기에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정비했던 것과 달리, 신라는 6세기 초까지도 왕권이 확립되지 못한 연맹체적인 정치체제를 탈피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와 백제는 일찍이 율령을 반포하고 국왕을 보좌하는 관료체제를 갖추었으므로 국왕이 불교를 수용하려는 정책을 취했을 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이를 시행할 수 있었지만, 신라의 경우에는 국왕의 불교 수용 의지에도 불구하고 귀족 세력들이 이에 반대하여 불교 수용 정책이 쉽게 추진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은 귀족세력에 대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정비하려는 정책들과 동시에 추진되었다.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 때 율령이 반포되었고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는 등 관료체제의 기본 골격이 갖춰졌다.

또한 귀족의 대표로서 상대등(上大等)을 두고 왕은 귀족들을 능가하는 초월적인 존재로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불교의 공인은 이처럼 왕의 권한이 강화된 시점에서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 삼국의 국왕들이 불교를 수용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은 불교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고대국가의 통치체제에 부응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대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의 부족연맹체 단계에서는 각 부족들은 각기 독자적인 전통과 신앙을 가지고서 독립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부족적 자율성을 해체하고 전체 사회 구성원이 하나의 단위가 되어 보다 강하게 결합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각 부족마다의 독자적인 전통이나 신앙을 모든 구성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전통과 신앙으로 대체해야 했는데,

불교가 바로 이러한 보편적 전통과 신앙에 적합한 사상체계였던 것이다.

불교는 본래 고대인도에서 부족적 전통과 신앙을 부정하고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을 추구했기 때문에, 한국의 고대국가 형성에도 중요한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또한 같은 이유 때문에 종래 각 부족의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부족적 전통을 유지하기 원하던 귀족들은 불교의 수용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불교의 수용에 의해 자신들의 부족적 전통이 갖는 사회적 비중이 축소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차돈의 순교사건은 왕과 귀족 사이의 이해관계의 대립에서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받들고자 하였지만 종래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귀족들의 반대 때문에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왕의 측근이었던 이차돈이 자신을 희생하여 왕의 권위를 높이고, 귀족들의 반대를 꺾고 불교를 받들게 했던 것이다.

이차돈의 목을 베었을 때 일어난 여러 이변들은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될 것이지만, 이차돈의 순교 이후 귀족들이 불교 수용에 반대하지 못한 것은 이변에 대한 놀라움 때문만이 아니라 이차돈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보여 준 왕의 강력한 권한행사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왕은 자신들과 대등한 귀족집단의 일원이 아니라 신민(臣民)들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의 불교 수용과 비슷한 상황이 일본에서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도 발생했다.

신라에서는 이차돈 한 사람의 순교로 마무리된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왕실과 귀족 사이의 대대적인 투쟁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불교에 대한 수용이 인정될 수 있었다.

 

이는 두 나라의 고대국가 체제의 진전 정도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에서 별다른 마찰 없이 불교가 수용된 것은 4세기 전반에 이미 고대국가 체제를 완성해 놓았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