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부처님 생애 2. 출가와 고행
2. 출가와 고행
1) 출가를 결심하다
(1)아들의 탄생과 출가의 결심
사문(沙門)을 만나고 돌아오는 싯다르타 왕자의 발걸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반면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정반왕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과연 정반왕 예감은 들어맞았다. 그 후로 싯다르타 왕자는 부왕에게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여러 차례 청하였다. 그럴 때마다 왕은 완강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달랬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 꼭 출가를 하지 않더라도 좋은 일은 얼마 든 지 할 수 있지 않느냐?" 하지만 왕자의 결심은 확고했다. 어느 늦은 밤, 홀로 궁전을 거닐면서 언제쯤 출가를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을 때 싯다르타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싯다르타 왕자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탄식하였다. "아 내게 큰 장애가 생겨구나" 왕자는 아기의 이름을 라훌라라고 지었다. 라훌라는 장애. 방해라는 뜻이다. 홀가분하게 가족과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려던 그에게 자식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출가를 막는 장애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오히려 싯다르타의 출가를 재촉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더 큰 애착이 생기기 전에 자신의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보고 떠나려던 왕자는 자칫 그들을 깨울까 봐 그만 두었다. 그는 모두가 잠든 밤에 가족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성문을 나섰다.
(2) 성을 나서다
싯다르타는 말을 타고 서둘러 성을 빠져 나왔다. 정반왕이 이상한 조심을 눈치 채고 있던터라 몇 겹으로 성문을 잠가 두었지만, 싯다르타의 출가를 막을 수 없었다.
마부는 울면서 마지막까지 싯다르타를 말렸다. 심지어는 악마까지 나타나서 이렇게 속삭이었다" 이제 7일만 지나면 당신은 이 세상을 다스릴 전륜성왕이 될 것이다. 7일만 꾹 참고 기다려라. 그러면 온 세상의 부귀영화가 모두 당신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악마의 속삭임도 왕자의 출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왕자가 탄 말발굽 소리가 정반왕과 도성의 사람들을 깨울까 봐 하늘의 신들이 말발굽 밑에 자신들의 손을 깔아서 소리가 나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성을 나온 싯다르타는 말과 마부를 돌려보낸 뒤, 가지고 있던 칼로 머리카락과 수염을 자르고 지나가던 사냥꾼과 옷을 바꿔 입었다. 이제는 누가 바도 완벽 한 수행자의 모습 이었다. 그는 바이샬리를 향해 길을 떠났다.
왕위도 버리고 사랑하는 아내 야소다라와 아들 라훌라마저 뒤로 한 채 깨달음의 길로 나아간 이 날이 태자 나이 29세 되던 해 음력 2월8일 이었다.
2)스승을 찾아서
(1)요가행자를 찾아가다
부처님이 태어나실 무렵의 인도 사회에는 매우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퍼져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도는 계급제도가 엄격한 곳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의 주류 종교는 브라만교였다. 당신 사람들은 태초에 브라만이 라는 신이 있어 열(熱)을 일으켜 하늘과 땅을 낳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해냈다고 믿었다.
따라서 브라만은 우주를 창조한 인격신이고, 우주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브라만 신을 찬양하는 의식을 집전하고 제사를 올릴 수 있는 자격은 사회의 최상위 계급인 바라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바라문 사상을 부정하며 나타난 혁신적인 종교 수행자들은"부지런히 수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문(沙問)이라 불렀다. 그들은 바라문교의 성전인<베다>의 권위를 부정하고 집을 떠나서 걸식 생활을 하며 수행하였다.
이들은 당신 신흥 도시의 왕후, 귀족, 부호의 정치적. 경제적 원조 아래 활발하게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경전에는 당시 대표적인 사상가 여섯 명을 육사외도(六師外道; 당시 인도 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6인의 철학자. 종교가의 유파)라고 부르며 여러 차례 소개하고 있다.
수행자 고타마(Gotama:최상의 소란 뜻으로 부처님의 성(姓)은 성을 나온 뒤에 이러한 사상가들이 대거 몰려 있는 바이샬리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요가의 대가인 알라라칼라 마와 웃다카 라마풋타를 찾아가 그들이 궁극의 경지라고 이야기하는 높은 선정의 단계 를 체험하였다. 하지만 이 선정을 통해서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었다.
선정에 들었을 때는 번민도 괴로움이 사라지지만 선정에서 나오면 여전히 욕심과 어리석음의 존재 그 자체로 돌아갔다. 자신들의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고타마에게 그들은 자신들의 교단에 남아 함께 제자들을 가르쳐 줄 것을 요청 하였지만, 고타마는 거절하고 그들 곁을 떠났다.
(2) 6년 간의 치열한 고행
이제 고타마는 당시 많은 수행자들이 걸었던 치열한 고행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고행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정도로 치열했다.
나는 하루를 대추 한 알로도 보냈으며, 맵쌀 한 알을 먹고도 지으며, 하루에 한 끼, 사흘에 한 끼, 이윽고 이레에 한 끼를 먹고 보름에 한 끼를 먹었다. 그래서 내 몸은 무척 수척해졌다. 내 볼기는 마치 낙타의 말 같았고, 내 갈비뼈는 마치 오래 묵은 집의 무너진 서까래 같았다. 내 뱃가죽은 등뼈에 들러붙었기 때문에 일어서려고 하면 머리를 쳐 박고 넘어졌다. 살갗은 오이가 말라 비틀어 진 것 같고, 손바닥으로 몸을 만지면 몸의 털이 뽑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말했다.'아, 싯다르타 태자는 이미 목숨을 마쳐 구나. 이제 죽을 것이다'라고 <불소행찬>
고타마의 고행은 6년이나 이어졌다. 그의 길고도 혹독한 고행은 그를 죽음직전의 상태로까지 몰아갔다. 정반왕이 아들을 염려하여 보냈던 다섯 명의 청년도 고타마와 함께 수행자로서 고행을 하였다.
당시 출가 사문이나 인도 사람들은 고행을 함으로써 욕망을 억제하고 정신생활의 향상 을 가져 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고행을 한 사람은 신비한 초인간적인 힘을 가지 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고타마는 고행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게 되었다. 고행은 육체를 극단적으로 학대하기만 할 뿐이었다. 몸의 피폐는 정신의 피폐를 가져왔고, 그 상태에서 맞게 되는 행복의 경지는 결코 진정한 열반의 단계라고 할 수 없었다.
결국 고타마는 고행을 포기하였다. 그것을 깨달음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풍조는 고행을 매우 중시하였던 터라 고타마의 고행 포기는 다른 수행자 들로부터 "타락한 사문'이라는 모진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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