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부처님 생애 2) 남달랐던 어린 시절
2) 남달랐던 어린 시절
(1) 부족함이 없던 소년 시절
왕자는 매우 영특하였다. 왕자가 6살이 되자 궁궐의 법도에 따라 스승에게 가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는 스승을 만나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세상에는 64개의 언어가 있는데 스승님께서는 어떤 언어로 학문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어린 왕자가 64개 언어의 이름을 하나씩 대면서 정중하지만 당당하게 질문을 던지자 스승은 자신의 한계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왕자님 죄송합니다만 저는 두 가지 언어 밖에 모릅니다"<불설보요경. 현서품>
또한 왕자는 무예에도 능해서 왕가의 소년들 중에 그를 따를 자가 없었으며 다른 왕가 의 후예들은 그런 싯다르타 왕자를 언제나 부러움과 공경, 질시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싯다르타 왕자는 자주 깊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부족한 것 없고 오직 쾌락만이 넘쳐나는 궁전에서 지내면서도 종종 알 수 없는 사색에 몰두하였다
(2) 농경제의명상
화창한 봄,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하면서 풍작을 기원하는 농경제에 정반왕과 싯다르타 왕자가 참석했다. 농부들이 힘차게 땅을 갈자 겨우내 굳어있던 흙이 따뜻한 햇살 아래 파헤쳐졌다. 그러자 땅 속에 숨어 있던 애벌레들이 꿈틀 거리며 기어 나왔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매 한마리가 애벌레를 낚아채어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환희에 찬 봄날에 왕자는 약육강식의 현실을 목격한 것이다.
왕자는 그 광경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생명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다른 생명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하지만 매도 그것을 먹지 않고는 생명을 이어갈 수 없지 않은가'
왕자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한참 후 축제에 정신이 팔려 있던 보모들이 왕자를 찾으러 왔을 때, 그들은 참으로 신기한 현상을 목격하였다. 주변의 나무들은 모두 해를 따라 그늘을 옮겨가는데 왕자가 앉아 있는 나무 그늘은 움직이지 않고 사색에 잠긴 왕자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정반왕은 자기도 모르게 아들인 싯다르타 왕자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3) 세상의 실상을 목격하다
싯다르타 왕자가 자주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것을 우려한 왕은 서둘러 아름다운 여인 야소다라를 왕자의 배필로 맞아들였다. 싯다르타가 19세 되던 해였다.
어느 날 왕자는 말을 타고서의 동문 밖으로 나갔다가 지금까지 만나 본 적 없는 아주 괴이한 사람과 마주쳤다. 그의 얼굴은 주름투성인데다 눈물과 콧물, 그리고 침을 저절로 흘러내렸다. 몸을 지탱하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있었고 등이 활처럼 굽어 사지를 덜덜 떨고 있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기는 왕자에게 마부가 말했다 "왕자님 저 사람은 노인입니다. 왕자님이나 저 역시 나이가 들면 저렇게 늙어갈 것 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늙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싯다르타는 노인의 모습에 놀라기도 하였지만, 자신도 저런 모습을 피할 길이 없다는 마부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왕자는 남문에서는 병자를 서문에서는 죽은 시체를 차례로 만났다. '대체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을 수는 없단 말인가?' '누구나 저 시체처럼 죽을 수밖에 없단 말인가?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넉넉한 마음 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들은 저리도 슬피 운단 말인가? 늙거나 병들거나 죽음이 없도록, 괴롭지 않도록 하면 되지 않는가?'
다음날 왕자는 북문으로 나갔다가 남들과 차림새가 다른 사람을 만났다. "저 사람은 사문(沙門)입니다. 행복을 찾아서 집을 떠나 수행을 하고 있는 사람이지요"
여기서 행복이란 바로 니르바나nirvana이다 니르바나란 '불어서 끄다'라는 뜻이다. 불이 꺼지듯 번뇌의 불이 꺼지는 것을 말한다. 늙음과 병듦, 그리고 죽음이라는 고통의 불에 몸과 마음을 태우며 신음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이 고요히 사라진 상태이다. 싯다르타는 행복이란 말에 가슴 가득히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이 세상에는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넘어선 행복의 경지도 분명히 있으리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태어난 자는 누구나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언젠가 는 소멸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생로병사의 엄연한 사실에 눈을 감게 하고 더 큰 쾌락으로 몰아넣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부딪혀야 할 존재의 결말에 대해 인간은 두려워하고 피하다 끝내는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는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런 괴로움의 순환이 시작되었을까?
이상 왕자가 네 문에서 보았던 일들을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 한다. 싯다르타 왕자의 사문유관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유하기 시작하는 즉 머나먼 구도를 위한 항해의 시작을 암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